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1942년 `메밀꽃 필 무렵`의 저자 이효석 사망

윤의사 2024. 5. 26. 10:53

소설가 이효석이 1942년 5월 25일 뇌막염으로 3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리 196번지에서 아버지 이시후와 어머니 평산 신씨 사이의 장남으로 1907년 2월 23일 태어났다. 한성사범을 졸업한 엘리트 아버지 덕분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이 살았다.

그러나 어머니 평산 신씨가 1911년 세상을 떠나면서 계모인 강홍경과의 불화로 평창읍내세서 하숙하며 평창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주말이면 평창에서 집까지 100리가 넘는 길을 걸어다니면서 오대산에서의 물놀이와 꽃놀이, 그리고 시장에서의 모습 등을 보면서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을 삼게 되었다.

1920년 4월에 경성 제1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평생 친구인 유진오를 만나 유진오는 시를, 이효석은 소설을 써서 서로 평가하며 우정을 나누었다.

1924년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해 법과를 전공했다가 영문학으로 바꾸면서 1928년 `조선지광`에 단편 `도시와 유령`을 발표함으로써 동반자 작가로 문단에 데뷔했다.

1930년 경성제대 졸업 후 이경원과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였다. 하지만 세계에 불어닥친 경제불황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워졌다. 이때 은사인  쿠사부카 소지가 총독부에 취업을 알선했으나  일본놈의 앞잡이라는 비난과 양심의 가책으로 15일만에 사직하였다.  사회주의를 동경하며 <노령근해>, <상륙>, <북국사신> 등  사회주의적 문학 경향을 보이다가 처가가 있는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교사를 하며 안정된 경제 기반으로 순수문학쪽으로 돌아섰다.

1933년 8월 정지용 김기림 이태준 이종명 김유영 유치진 조용만 이무영 등과 순수문학을 표방하며 `구인회`를 결성했다.

구인회는 그 뒤 이효석과 이종명 김유영 유치진 조용만이 탈퇴하고 박태원 이상 박팔양 김유정 김환태가 들어가는 등 구성원들은 바뀌지만 회원수는 늘 아홉이었다.

1934년 숭실전문 교수가 되어 더욱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면서 1936년에는 한국 단편소설의 백미라 불리는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했다.

하지만 1938년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전문이 폐교당한 이후 1940년 부인과 자녀들의 사망으로  큰 충격을 받고 이듬해 뇌막염에 걸려 대수술을 받았다. 병마의 후유증은 계속되어 1942년 5월 평양도립병원에 입원했으나 불치의 진단을 받고 치료 중 25일 3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작품은 성과 자연을 시처럼 엮었으며 서정적인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가 일제시대 관리를 하였기에 그도 자유로울 수 없으며, 숭실전문이 폐교된 후 만주를 여행하며 일제를 찬양하는 글을 써서 친일작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