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오늘은 베델, 영자 신문 〈The Korea Daily News〉 창간

윤의사 2024. 1. 29. 20:13

어네스트 토마스 베델(Ernest Thomas Bethell, 한국 이름 배설-裵說)은 세상을 떠나면서

나는 죽을지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민족을 구하라.”

는 유언을 남겼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베델이 대한민국의 독립과 언론 자유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베델은 1904310일 영국 데일리 메일(Daily Mail)의 특파원 자격으로 한국에 와서 일본의 무자비한 조선 침략을

비판하면서, 코웬양기탁 등과 1904718<대한매일신보>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베델을 발행인으로 한 것은 당시 일본인 검열관의 사전 검열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무자비한 조선 침략에 대해 강력한 조선인의 저항을 국제 사회에 널리 알리고자 영자 신문

The Korea Daily News1909129일 창간하였다. 또한 일본에 의해 자행된 명성황후 시해 사건부터 조선에 대한 잘못된 침략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고 난 뒤 장지연이 <황성신문>이날을 목 놓아

크게 통곡하노라라는 명 논설을 게재하여 장지연이 체포되고 신문이 정간된 이후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

역할을 대신했다.

<대한매일신보>는 의병전쟁에 대한 전과를 보도하면서 일본군이 의병에 대해 저지르는 무자비한 보복과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잔인한 학살 행위를 폭로ㆍ비판했다. 일본 경찰의 신문사 출입을 막기 위해 일인불가입(日人不可入)’

이라는 글을 출입구에 게시해 접근을 막았다. 영국인이기에 베델에 대한 조치를 할 수 없었던 일제는 영국 대사관에

베델을 출국시키려는 요총을 보내고 결국 영국의 협조를 받아 베델은 재판을 받으며 3주간 투옥되기에 이르렀다.

1908712일 서울로 돌아와 항일언론 활동을 계속하다가 190951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으며,

많은 한국인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한강변에 있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묘원에 있는 베델의 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