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오늘은 진보당 사건의 조봉암 간첩 혐의 무죄 선고

윤의사 2024. 1. 20. 14:09

2011120, 조봉암 간첩 혐의 재심에서 무죄 선고가 나왔다.

그런데 치안국에서 조봉암을 '공산주의자'라고 발표한 날은 1958년 1월 20일이기에 어찌 역사가 이럴 수가...

조봉암은 일제식민지 시기에 소련에 가서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 대학을 2년 수료하고,

1925년 조선공산당 조직중앙위원장을, 그리고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가 되었다.

이후 소련, 중국, 만주 등에서 독립운동과 공산주의에 관한 일을 하다가 1932년 9월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하였다.

해방이 되어 조선공산당, 건국준비위원회 인천부지부, 민족주의 민주전선 인천부지부 등에서 활동하다가

1946년 5월 박헌영과의 갈등으로 반좌익으로 전향해 좌우합작 운동에 참여하였고 남북협상에 임하다가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48년 7월 국회 헌법기초위원장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며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장관과

제2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1956년 5월 15일에 제3대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가 있었다.

이승만과 이기붕의 자유당 후보에 맞서 민주당에선 신익희와 장면, 진보당에서는 조봉암과 박기출 등이 출마했다.

민주당과 진보당에서는 대통령 후보로 신익희로 단일화하였으나,

호남 지역을 유세하던 신익희가 뇌출혈로 사망함에 따라 이승만, 조봉암의 대결이 되었다.

하지만 민주당은 조봉암을 지지하지 않고 신익희 추모표라는 무효표를 던지라고 독려하여

실제 전체 투표자의 20%인 1,856,000 이상의 무효표가 나왔다.

사사오입사건으로 삼선의 길을 연 이승만에 대항하여 야당 단일후보를 지지해야 했던 민주당의 비협조가

조봉암의 당선으로 이어지지 못하게 된 것이다.

개표 결과 56%와 24% 가량의 득표수가 나왔다고 하나, 조봉암의 고향인 강화도에서 2만표 가량이 이승만 표로

둔갑했다는 주장도 있을만큼 조봉암은 '투표에서 이겼지만 개표에서 졌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자유당은 조봉암이 대선에서 상인 양명산을 통해 북한의 자금을 받았다는 혐의로

1958년 체포돼 1959년 7월 31일 60세의 나이에 교수형을 당했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은 그가 북한 의 지령을 받아 간첩행위를 했다고 볼 증거가 없다고 판단하여 무죄를 선고했다.

.(사진 출처:진성규교수님)

조봉암 어록비
진보당 사건 재판을 받는 조봉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