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문화사전/잘난 척하기 딱좋은 우리불교사전

완주 화암사

윤의사 2023. 11. 15. 17:35

전라북도 완주군 경천면 가천리에 가면 불명산 시루봉 남쪽에 오래된 절이자 안도현 시인의 말을 빌리면 잘 늙은 절인 화암사(花巖寺)가 있다. 가천은 아름다울 ()’와 내 ()’으로 맑고 아름다운 시냇물이 흐르는 실개천 옆에 자리잡은 절이다. 절이 산 속 깊숙이 자리잡고 있어 15세기에 만들어진 화암사중창기(華巖寺重創記)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절은 고산현(高山顯) 북쪽 불명산(佛明山) 속에 있다.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숙하며 봉우리들은 비스듬히 잇닿아 있으니, 사방을 둘러보아도 길이 없어 사람은 물론 소나 말의 발길도 끊어진지 오래다. 비록 나무하는 아이, 사냥하는 사나이라고 할지라도 도달하기 어렵다. 골짜기 어구에 바위벼랑이 있는데, 높이가 수십 길에 이른다. 골골의 계곡물이 흘러 내려 여기에 이르면 폭포를 이룬다. 그 바위벼랑의 허리를 감고 가느다란 길이 나 있으니, 폭은 겨우 한자 남짓이다. 이 벼랑을 부여잡고 올라야 비로소 절에 이른다. 절이 들어선 골짜기는 넉넉하여 만 마리 말을 감출 만하며, 바위는 기이하고 나무는 해묵어 늠름하다. 고요하되, 깊은 성처럼 잠겨 있으니, 참으로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어둔 복된 땅이다.

산속에 감춰진 절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로 절을 지을 때의 자세한 기록은 없다. 전설에 의하면 선덕여왕의 별장이 이곳에 있어 행차할 때 용추(龍湫)에서 오색이 찬란한 용()이 놀고 있었고, 그 옆에 서 있던 큰 바위 위에 무궁초가 환하게 피어 있었으므로 그 자리에 절을 지은 뒤 화암사라고 했다고 한다. 화암사 극락전과 우화루를 보수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실린 화암사 중창기의 내용에

 

예전 신라의 원효, 의상 두 스님이 중국과 인도를 편력하다 도를 이루고 돌아와 이곳에 석장(錫杖)을 걸고 절을 지어 머물렀다. 절의 주존불인 수월관음상은 의상스님이 도솔천에 노닐다가 친히 관세음보살의 진신(眞身)을 보고 만든 것으로, 등신대의 원불이다. 절의 동쪽 산마루에 대가 있으니, 그 이름을 원효대라고 하고, 절의 남쪽 고개에 암자가 있어 그 이름을 의상암이라 하는데, 모두가 두 분 조사가 공부하던 곳이다.’

라는 것으로 보아 문무왕을 전후한 시기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화암사에는 국보 제 316극락전(極樂殿 )’이 있다. 중생들이 근심 걱정없이 살 수 있는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극락전은 1981년 해체수리할 때 발견한 기록에 따르면, 세종 7(1425) 전라도 관찰사 성달생의 뜻을 따라 주지 해총이 4년간 공을 들여 다시 지었다. 중창불사 덕분에 큰 절로 거듭났으나 임진왜란 때 극락전 등을 빼고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탔으며, 현재의 극락전은 숙종 37(1711)에 중건한 것이다.

극락전은 중국 남조 시대에 유행하던 하앙식(下昻式) 건물로 유일하다. 하앙식 구조란 건물 바깥쪽에 처마 무게를 받치는 부재(지붕과 기둥 사이에 끼운 긴 목재)를 하나 더 설치하여 지렛대의 원리로 일반 처마보다 훨씬 길게 내밀 수 있게 한 구조이다. 남조와 교류하던 백제시대 건물에서 볼 수 있으며, 백제를 통해 일본의 건축에 영향을 주어 법륭사 금당을 지었다. 그런데 1976년에 화암사 극락전이 보고되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는 발견을 하지 못해 일본에서는 백제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직접 중국과 교류를 했다는 증거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일본의 역사왜곡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하앙식 건축방법은 아마도 산 속 깊숙이 있는 화암사에서 비바람, 눈의 들이침을 막기 위한 구조가 아닐까 생각된다.

앞면 3, 옆면 3칸 크기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고, 작은 규모로 평범하지만 친숙한 시골집처럼 보인다. 다포 양식으로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 장식을 더 올린 구조이다. 아미타여래를 모셨으며, 여래상 위에는 지붕 모양의 닫집을 만들고 용을 새겨 놓았다.(사진:문화재청)

극락전의 현판이 특이하다
극락전의 하앙식 구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