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여성독립운동가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

윤의사 2023. 5. 31. 17:35

권기옥은 1901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아버지 권돈각과 어머니 장문명 사이의 14녀 중 차녀태어났다.

첫째에 이어 둘째도 딸이 태어나자, 그녀의 아버지는 이름을 갈네라고 지었는데, ‘가라는 뜻으로 '얼른 죽으라'는 의미로 아들선호사상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권기옥의 집안은 원래 부자였지만, 아버지의 노름으로 많던 재산을 날려 살 집도 없어 남의 집 문간방에 살았다. 권기옥은 11살이었지만 학교는 꿈도 못꾸고 공장에 취직해 돈을 벌어야 했다. 어깨너머로 언니의 책을 들여다보며 글자를 배우던 그녀가 12세 되던 해, 교회에서 운영하는 송현소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송현소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숭의여학교(현 숭의여자 중·고등학교) 3학년으로 편입해 다녔다.

권기옥은 17세 때 평양에서 미국인 아트 스미스가 하늘에서 곡예비행을 하는 것을 보고 비행사를 꿈꾸었다.

권기옥은 숭의여학교 교사인 박현숙의 권유로 비밀조직인 송죽회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펼쳤다. 3월과 10월에 만세운동으로 6개월 옥고를 치르고 중국으로 망명, 상해 임시정부의 추천으로 1924년 초 저는 비행사가 되어 조선 총독부 건물을 폭파하고 일본 도쿄에 있는 일왕의 궁성에 폭탄을 투척하고 싶습니다.”라며 당당하고 결의에 찬 권기옥의 태도에 운남성의 군사령관인 탕지야오는 여자를 제한하던 것을 무시하면서 입학을 허락해 운남항공학교에 입학했. 항공학교에 권기옥이 재학 중이라는 소식에 일본 경찰은 그녀를 체포하거나 암살하려 했다. 심지어 그녀를 발견하면 무조건 죽이라고까지 했다. 이런 까닭에 그녀는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새벽에 비행 훈련을 해야 했고, 학교 밖으로는 나갈 수도 없었다.

19252월 권기옥은 윈난항공학교 제1기 졸업생이 되어 첫 한국인 여성 비행사가 되었지만 임시정부에 공군이 없어, 중국 국민당 공군이 되어 비행기 조종사로 10년 넘게 근무했다.

일본이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키고 중국을 공격하자 그녀는 독립운동가 남편인 이상정과 함께 충칭에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육군참모학교 교관으로 영어와 일어를 가르치고 일본인을 구별하는 방법도 가르쳤다.

이와 함께 충칭 임정 산하에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조직해 활동하며 좌우익의 단합된 힘을 바탕으로 독립을 위해 노력하였다광복 후 상하이를 거쳐 장제스 정부와 함께 타이완으로 옮겼으며 1949년에 귀국했다.

고국으로 돌아와 국회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으로 공군 창설에 기여했다. 또한 <한국연감> 발행인을 지내고, 3.1여성동지회를 만들어 현양사업을 하였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배움을 포기해야 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였는데, 장학금 마련을 위해 장충동의 낡은 목조 건물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88419일 강동구 둔촌동 보훈병원에서 노환으로 서거한 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공로를 인정받아 1971년 장제스 정부로부터 중화민국 비행흉장과 공군일급상장을 받았으며,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대한민국 공군사관학교 공군박물관(충북 청원 소재)의 자료실에는 "권기옥은 중국 운남항공학교 1기 졸업(1925)으로 한국인 최초의 여류 비행사이며 중일 전쟁 참가, 7000시간을 비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국가보훈처 자료집에서도 권기옥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서술하고 있다.(사진:숭의여고)

윈난항공학교 졸업장
선전비행 준비 중 권기옥(왼쪽에서 두 번째)

브릭으로 만든 권기옥 비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