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여성독립운동가

오늘은 여성독립운동가 어윤희 선생 타계

윤의사 2022. 11. 18. 11:26

어윤희는 1880620일 충북 충주군 소태면 덕은리 산골에서 어현중(魚玄仲)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천자문대학까지 가르칠 정도로 상당히 개방적이었다.

특히 말은 충성되고 진실되게, 행실은 착실하고 남을 공경하라(言忠信 行篤敬)”며 인간다운 삶의 의미를 강조했다.

12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894년 결혼했지만 3일 만에 남편이 동학군에 참여해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하면서

청상과부가 되었다. 1896년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니 삶에 회의를 가진 어윤희는 고향을 떠나 10여 년간 평산,

해주 등지를 떠돌다가 1909년 개성에 정착했다.

3.1운동의 33인 중 한 명인 정춘수의 설교에 감동해 개성북부교회에서 갬블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애국계몽운동가가 되었다. 그녀는 갬블선교사의 추천으로 미국의 남감리교에서 운영하던 미리흠여학교를 졸업하고

호수돈여학교에서 근대교육을 받은 후 개성의 여자성경학원에서 기숙사 사감으로 활동하면서도

여성들의 인권신장을 위해 노력했다.

3·1만세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면서 228일 독립선언서 100부가 개성에 도착했으나

오화영 목사는 주민들에게 배포하지 않았다. 이 소식을 보모로 일하던 권애라에게 들은 어윤희는 보따리 장사로 위장해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한편, 인근 마을에도 독립선언서를 돌렸다.

이어 여자성경학원 기숙사에서 독립선언서 인쇄와 시위 현장에서 사용할 태극기 등을 만들었다.

거사일은 33일 오후 2시로 정했다.

기도회에 참석한 일행은 어윤희를 선두로 찬미가독립가를 부르며 독립만세를 외쳤고,

시민들도 참가해 1천여 명이 참여했다.

어윤희는 숙소에서 일제 경찰에 끌려가면서도 당신들이 내 몸을 묶어 갈 망정 내 마음은 못 묶어 가리라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검사가 심문하면서도 당당했다.

 

조사를 받던 어윤희에게 검사가 호통을 쳤다.

저 앙큼한 년 봐라. 다 아는 거짓말을 하는구나. 저년을 발가벗겨라.”

내 몸에 누가 손을 대. 발가벗은 내 몸뚱이 보기가 그렇게 소원이거든 내 손으로 직접 옷을 벗겠다.”

옷을 훌훌 벗어 던진 어윤희는 다시 소리쳤다.

, 실컷 보시오, 당신 어머니도 나 같을 것이고, 당신 부인도 나 같을 것이요.”

어윤희의 뜻밖의 행동에 놀란 검사가 오히려 당황하여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어서 옷을 입혀 데리고 나가라.”고 했다.

 

어윤희는 보안법 위반으로 1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8호방에 수감됐다.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3·1만세운동의 주역인 유관순을 비롯해 수원 기생 김향화, 파주의 구세군 부교 임명애 등과

함께 하는 옥중생활이었다.

일제의 혹독한 악형과 탄압에도 어윤희 등은 2월 말부터 통방이라는 비밀 연락망으로 여옥사 전체에

31일 오후 28호 감방에서의 신호로 2020311주년 기념 만세운동을 했다. 유관순과 신명철은 주동자로

일본 경찰에 의해 심한 구타와 고문을 받고, 결국 유관순은 고문 후유증으로 928일 순국했으며

어윤희는 1년 이상 투옥 후 1920428일 출감했다.

한편 세브란스병원 의료선교사 스코필드는 서대문형무소를 자주 찾았다.

감옥에서의 고문과 악행을 미국과 세계에 알렸다. 어윤희에게 옥중 고난과 저항 소식에 깊은 감명을 받은 소크필드는

큰 감명을 받고 의남매가 되었다.스코필드는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옥중 수난과 투쟁활동을 꺼지지 않는 불꽃(The Unquenchable Fire)’으로 기록하면서 알렸다.

어윤희는 개성의 여성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개성여자교육회에 참여해 여성개조론에 바탕한 여성운동에 참여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처럼 남을 배려하는 어윤희의 명성은 항일투쟁독립운동가로 이름을 알리면서 여성들의 민족의식

향상과 여성 교육에 힘썼다.

어윤희는 개성여자교육회를 발판으로 근우회 개성지회를 1929615일 조직했다.

이 단체의 목표는 봉건적 굴레와 일제 침략으로부터 진정한 여성해방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1937년 개성 유지인 한철호와 오기환의 도움으로 유린보육원이란 고아원을 세우고 아동복지 활동에 헌신했다.

6.25전쟁 발발 후 남쪽으로 피란 와서 1952년 마포 서강감리교회에 유린보육원을 설립하여 고아들을 돌보다가

19611118일 세상을 떠났다. 어윤희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서대문형무소 투옥 당시 어윤희 선생
청주여성독립운동가기념관의 어윤희 선생 흉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