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여성독립운동가

브릭으로 만나는 여성독립운동가, 김란사

윤의사 2023. 5. 9. 19:25

김란사는 187291일 평안남도 안주군의 부잣집에서 태어나 무역업을 하는 부친 덕에 남 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공부에 뜻이 있었으나 여자라서 서당에 다니지 못하자 아버지를 설득해 집에서라도 공부할 수 있었다. 김란사가 공부하려는 것은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결혼 후엔 기혼자의 입학을 허락하지 않던 이화학당에 하인과 함께 프라이 교장을 찾아가 하인이 들고 있던 등불을 끄며 자신의 앞날이 이렇게 어두우며 조선의 현실이 이렇게 어두우니, “꺼진 등에 불을 켜고 싶다라는 그의 의지가 받아들여져서 이화학당에 들어갔다.

서재필 박사가 정동 교회에서 미국인들이 남녀차별 없이 활동하는 것에 감동을 하여 미국 유학을 결심하고 남편 하상기 씨와 도미하여 오하이오주 웨슬리언대학에서 공부했다.

김란사는 학생들에게 외세의 침략이나 간섭을 받지 않으려면 교육을 통해 조국의 현실을 깨우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화학당 교사로 유관순을 비롯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 3·1운동의 주역이 되게 하였다. 미국에서 공부하면서도 각 지역을 돌며 교포들에게 독립 정신을 심어 주는 강연을 했다.

여성들이 깨쳐야 자녀를 잘 가르쳐 나라의 미래가 밝다고 생각한 김란사는 여성을 위한 학교를 세워 교육하였다. 순헌황귀비를 설득해서 진명여학교와 숙명여학교를 세우게 했으며, 이화학당 안에 대학과가 생기자 이화학당 출신 최초의 대학 교수가 되었다. 윤치호가 여성 교육이 시어머니에게 순종하지 않으며 살림할 줄 모르는 여성을 길러낸다며 비판하자 잡지를 통해 공개적으로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김란사는 자신의 활동에 전폭적인 지지를 해주는 남편 하상기를 존경하면서, 존경과 사랑의 표현으로 남편의 초상화를 뱃지로 만들어 가슴에 달고 다녔다. 또한 미국으로 갈 때 미국식대로 입국카드에 남편 성을 따라 하란사라고 적었다. 사실 란사(蘭史)’라는 이름도 세례명 낸시(Nancy)’에서 따온 것이다.

김란사는 1913년에 세계감리교 총회에 여성 최초로 한국교회 평신도 대표로 참석했다가 시카고대학 신학 전문과에서 공부를 다시 하였다. 이때 김란사는 미국교회에서 예배 볼 때 연주된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경건함과 성스러움을 배가시키자 조국의 정동교회에 기증하고자 모금해 1918년에 설치하였다. 6·25 때 일부가 훼손된 것을 다시 복원해 지금도 정동교회에 남아있다.

김란사는 파리 강화 회의에 조선 대표로 뽑혀 미국과 조선이 다른 나라로부터 침략받으면 서로 도와준다는 내용이 담긴 외교 문서를 외국 대표들에게 보이며 조선의 독립을 주장할 예정이었다. 잠시 북경에 머무르던 김란사는 310일 급서했다. 교포들이 베푼 저녁 만찬 후 갑자기 사망했는데, 일본 외무성 문서에 기록된 사인(死因)은 유행성 독감(폐렴)이었다. 그러나 전보를 받고 달려온 남편 하상기는 시신이 검게 변해 있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독살()도 있다. 김란사가 참석한 만찬장에 일본의 스파이였던 배정자가 보낸 사람이 참석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가능성 있는 설()이다.

하지만 뜻을 펼치기도 전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김란사는 1995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고, 2018년에는 국립현충원에 위패가 안장되었다.

김란사
김란사가 기증한 파이프오르간이 있는 정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