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여성독립운동가

여성독립운동가, 조신성 선생

윤의사 2021. 10. 11. 11:30

조신성 선생은 1874년 10월 3일 평북 의주에서 조춘택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그녀는 사업에 실패하여 출가한 아버지와 9세 때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 고모에게 의지해야만 했다.

16세 때 혼인을 했으나, 아편 중독자인 남편이 가산을 탕진하고 자살하고

시댁의 학대로 가출한 후, 1897년 의주읍교회에서 베어드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는 기독교의 가르침대로 조신성은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힘을 쏟았다.

조신성은 1898년 서울로 상경하여 이화학당과 교원양성소에서 교육을 받고 교편을 잡다가,

1908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간다성경학교와 요코하마성경학교에서 공부했다.

귀국한 조신성은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평양 진명여학교 교장이 되어 후진을 양성했다.

학교가 경영난으로 어려움을 겪자, 학교를 그만두고 농촌계몽활동에 힘썼다.

1920년 11월 대한독립청년단연합회 평안남도 총무인 김봉규의 대한독립청년단에 가입하여

맹산군 선유봉 호랑이굴에 숨어 일본 관리와 친일파를 위협하는 한편,

유지들에게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상해임시정부에 보냈다. 이에 조신성을 '평안도 호랑이'로 불렀다.

1920년 11월 6일 영원군 서창면에서 대한독립청년단 김봉규, 안국정과 같이 가다가 불심검문을 당하자

순사의 허리를 껴안고 군도를 빼앗아 던져 독립 청년들을 구했으나,

공무집행방해죄로 징역 6개월형을 받고 평양감옥에서 복역했다.

1921년 만기 출옥할 즈음 '맹산선유봉독립청년단 사건'의 활동이 발각되어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계속 복역했다.

1928년 평양에 근우회 지회가 설립되자 지회장에 선출되어 야학과 후진을 양성했다.

1932년에는 가난하여 배우지 못하는 어린이를 위한 고육원을 운영하였다.

8·15해방 후 평양에서 김일성이 조선민주여성총동맹 북조선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으나,

1945년 11월 "공산당은 내 동포가 아니다"라고 하며 월남했다.

1948년 2월 대한부인회가 조직되자 부총재로 선출되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으로 피난가서 가난하게 살다가 신망애양로원에서 1953년 5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조신성의 장례식에 참석한 근우회 회원들은 혈육없이 세상을 떠난 그녀를 위해

'어머니 날' 행사를 가졌다. 이것이 유래가 되어 1958년 2월 나라에서는 '어머니 날'을 공식 제정하게 되었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현재 대전현충원에 잠들어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