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여성독립운동가

오늘은 서울여학생만세시위운동주도 송계월

윤의사 2023. 1. 16. 19:35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그 기세는 1930년 3월까지 이어지는데, 서울에서는 1930년 1월 15일과 16일에 절정을 이루었다.

이 만세운동을 주도한 사람이 송계월 지사이다.

송계월 지사는 1911년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에서 송치옥과 이순희 사이의 6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어부이자 신창사회청년구락부 및 북청 노동연맹 회원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사상 방면의 책과

사회과학 서적을 많이 읽었다. 신창공립보통학교 재학 시절에는 신창 지역 3·1만세운동을 주도한 은사 김용식의 영향을

받았다. 보통학교 졸업 후 열다섯 살에 "서울에 대한 동경심과 더 배우겠다는 향학열"로 상경하여 19274

경성여자상업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교장의 친인척 교사 채용, 한국인 교사의 부당 해임, 학교 설비 미비라는

학교의 불법행위에 저항해 3차례 동맹휴교를 주도하였다. 경성여자상업학교 시절인 19301월 종로구 가회동 자신의

하숙집을 회합 장소로 제공하고, 대표자 회의를 통해 여학생 만세운동을 결정하면서 서울여학생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1929년의 광주학생운동을 계승한 서울여학생 만세운동은 1930115일과 16일에 일어났는데, 광주학생운동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위무정책을 쓰던 총독부에서 피의자들을 성별로 나눠 여학생만 따로 떼어내 처벌했기에

서울여학생 만세운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송계월과 함께 여학생들의 연합 시위를 지도한 근우회의 허정숙,

이화여고보의 주동자인 최복순과 김진현·최윤숙, 시위 중 유리창을 깨뜨리는 등 과격행동을 한 임경애,

또 하나의 대표자 회의를 주도하며 시위 당일 가두 진출에 성공한 여자 미술의 박계월, 그리고 붉은 깃발과 사회주의적

구호가 적힌 전단을 제작하여 이화여고보의 시위에 흔들게 한 이화전문 휴학생 이순옥이 보안법 위반으로 검사국에

송치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송계월은 2개월가량 투옥된 뒤 322일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의 선고를 받고

326일 출감하였다.

19312월 졸업 후 2개월여간 일본계 조지아백화점 점원으로 근무하면서 사회로 진출한 신여성들이 겪는

조선인으로서의 민족 문제, 노동자로서의 계급 문제, 여성으로서의 성차별 문제를 체험하였다.

19314월에 개벽사의 기자 제의를 받고 잡지 신여성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신여성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여성차별과 해방에 관한 많은 글을 썼다. 신여성19314월호에 송적성(宋赤城)이라는 필명으로 쓴

내가 신여성이기 때문에가 첫 기사이다. 이 글에서 '진정한 신여성'이란 '개성의 자각과 사회의식을 가지고,

가정부인과 노동여성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잡지사 기자로 재직하면서 <가두 연락의 첫날>, <공장 소식> 등의 작품도 남겼다. <가두 연락의 첫날>은 자신이

독립만세운동을 할 당시 비밀활동에 참여한 연락원으로서의 경험을 쓴 작품으로 내면 심리를 잘 표현하고 있다.

문학평론가 백철은 송계월을 프롤레타리아트문학을 대표하는 20명의 작가의 한명으로 평가할 정도였다.

19325월에는 수감 생활 중 얻은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귀향해 쉬던 중 카프 동료회원인 이갑기가 처녀출산

하기 위해 귀향했다는 가짜뉴스를 기고하면서 이윤만 추구하는 황색 저널리즘을 비판하면서 저널리즘의 윤리적 책임을

거론하면서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잘 나가는 송계월에 대한 동료의 질투와 시기를 보여준 것이었다.

송계월은 193353123세의 젊은 나이에 고향에서 장결핵(腸結核)으로 사망하였다.

그녀의 독립운동은 2019년에서야 평가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930년 1월, 서대문 형무소에서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