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여성독립운동가

여성독립운동가 안경신의사

윤의사 2021. 8. 14. 19:52

내일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지 76년이 되는 날이다.

순국으로 독립을 위해 애쓰신 선열들께 감사드리면서...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안경신의사를 돌아본다.

 

1920년 8월 3일,안경신의사는 5개월재 된 임신한 몸으로 평남 도청과 평남 경찰부에 폭탄을 던졌다.

1888년 7월 22일, 평남 대동에서 출생한 안경신의사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 운동을 벌이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0일 동안 감옥에 있었다.

출옥 후 같은 해 11월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쌀 한 가마니에 1원 하던 시절 2400원을 모금하여 상해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하자,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소속 광복군 총영에서 활동하였다.

1920년 8월에 미국 의원단이 중국을 방문한 뒤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세계 여론에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호소하고자 폭탄 거사를 준비하였다.

임신한 몸이면서 여성이 하기에 너무 위험하다고 만류하니,

안경신의사는 "여성이기에 의심을 피할 수 있으니, 저에게 더 중요한 일을 시켜주세요"라며 의지를 불태웠다.

평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기로 한 안경신의사는 비가 오는 날이기에 발화가 되지 않아 실패하면서 쫓기는 몸이 되었다.

일본 경찰에 쫓기며 제대로 먹지를 못하여 출산한 아이는 제대로 앞을 보지 못하였다.

출산 직후 1921년 3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0년의 옥고를 치렀다.

안경신의사는

"평화로운 방법의 항일 운동은 큰 효과가 없다. 나는 일본이 놀라 그들을 쫓아낼 수 있는 방법은 무력적인 방법, 즉 투탄(投彈, 폭탄을 던짐), 자살(刺殺, 칼로 찔러 죽임), 사살(射殺)과 같은 것이 효과가 크게 나타난다고 믿고 있다."

라면서 무력항일투쟁에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옥고를 치른 안경신의사는 생활고와 어머니의 안타까운 죽음, 그리고 불우한 자식 걱정 등으로

출옥 후의 생사를 알 수가 없다.

정부는 안경신의사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