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여성독립운동가

여성독립운동가 수원 기생 김향화

윤의사 2021. 2. 23. 16:55

1897년 7월 16일 서울에서 태어난 김향화,

그러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경기도 수원에 살던 정도성과 결혼을 했으나,

정도성에게는 김향화보다 6세나 많은 딸이 있었다.

결국 18세 되던 1914년에 이혼을 하고 친정으로 왔으나,

같은 해 5월에 부친의 사망으로 집안은 더욱 기울어졌다.

이에 김향화는 가족 부양을 위해 기생이 되었다.

그녀는 1918년 <조선미인보감>이라는 홍보책자에 32명의 기생 중 1인으로 소개되었다.

 

조선미인보감에 실린 김향화

 

갸름한 얼굴에 주근깨가 그녀의 멋을 더하였다.

순한 성품에 귀염성이 있었다.

탁음이 섞인 애원성이 있는 목소리로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특기가 있었다.

1919년 3월 1일 고종의 장례식에 서울에서 울려퍼진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김향화,

수원에서도 3월 16일부터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김향화를 비롯한 수원 기생 30여 명도 3월 29일 정기 검진을 받기위해 간 자혜의원 앞에서 만세시위를 하였다.

자혜의원 맞은편에는 경찰서가 있었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김향화의 만세시위를 본 수원 시민 300여 명이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후에 경기도립병원이 된 자혜의원 자리에 복원된 봉수당

2개월 여의 감금과 고문에 끝에 5월 27일 수원지청 검사분국에서 재판을 받고 6개월간 감옥생활을 하였다.

2009년 4월 국가보후처로부터 독립유공자로 확인을 받았지만,

후손이 확인이 안되어 표창장과 훈장을 수원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김향화가 독립운동을 하게 된 이유는

정조의 어진이 모셔진 봉수당을 훼손하고 그곳에 자혜의원을 만든 일본의 만행을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일본군에게는 술도 따라주지 말며, 권주가도 부르지 말 것을 동료들에게 말했다.

그녀의 동료들에게 한 말,

"우리도 춘삼월 독립군이다!"

출옥 후의 김향화 소식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1950년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수원박물관에 보관 중인 훈장과 표창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