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인물여지도

무의공 이순신

윤의사 2020. 4. 15. 10:46

1592110. 비가 내내 내렸다. 방답(防踏)의 신임 첨사(僉使)가 들어왔다.

 

<난중일기>의 일부분이다.

방답은 이순신이 관할하던 전라좌수영의 5()5() 5포의 한 곳이다.

5관은 순천광양보성흥양낙안이며, 5포는 방답사도발포녹도여도이다.

5포를 지휘하는 장수들 중 방답과 사도는 첨사가, 발포와 녹도, 여도는 만호가 책임자였다.

첨사는 첨절제사가 정식 명칭으로 종3품의 고위직이었다.

육군에는 병마첨절제사, 수군에는 수군첨절제사가 있었으며, 3품이었던 병사수사 바로 밑의 계급이었다.

방답 신임 첨사의 이름도 이순신이다.

전라좌수사가 이순신인데, 방답 첨사 이순신이라니, 이 두 사람은 이름은 같지만 전혀 다른 두 사람이다.

즉 전라좌수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으로 덕수 이씨이며,

 방답의 신임 첨사는 무의공 이순신(李純信)은 전주 이씨로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의 후손이다.

두 사람은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했으며,

충무공이 있는 곳에 무의공이 있었고 무의공이 있는 곳에 충무공이 있었다.

무의공 이순신은 훗날 원균이 이순신을 비판할 때

너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다라고 했는데, 그 다섯 아들이라고 평가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다섯 아들은 바로 이순신과 함께 전장을 누비며 생사고락을 함께 하여 부자관계처럼 끈끈한 관계를 맺은 순천 부사 권준, 녹도 만호 정운, 흥양 현감 배흥립, 광양 군수 어영담, 그리고 방답 첨사 무의공 이순신을 가리킨다.

 

무의공 이순신은 이순신장군보다는 9살 아래인 1554년생이다. 자는 입부(立夫)이고, 시호는 무의(武毅)이다.

32세의 이순신이 1576년 정기 시험인 식년시에서 급제했다면,

무의공은 그 이듬해인 1577년에 23살의 나이에 특별시험인 무과 별시에서 급제했다.

 

그 후 의주 판관, 혜산진 첨사로 북방에서 여진족을 격퇴했으나, 1589년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함께 파직된 장수 중 전라우수사로 이순신을 도왔던 이억기장군도 있었다.

그리고 일본에 갔던 통신사의 전언으로 1591년 방답첨사가 되어 충무공 이순신과 만남이 이루어졌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이순신장군의 중위장으로

왜군과의 첫 싸움인 옥포합포해전 때부터 출전해 크게 활약했다.  

무의공은 159266일에 이순신장군에게

산에 올라간 일본군이 반드시 당항포에 남겨둔 배를 타고 새벽에 몰래 나올 것이니, 그들을 바다에서 공격하자고 제안해, 배를 타고 도망치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무의공이 왜군 장수에게 활을 쏘아 명중시켜 떨어뜨렸다.

그날 무의공은 일본군 전선을 빼앗아, 그 적선에 있던 일본군의 <분군기>를 노획하기도 했다.

<분군기>는 일본군 3,040명이 자신의 이름 밑에서 피로 서명한 문서였다.

임진왜란 승리의 3대첩 중 하나인 한산대첩이 159278일에 벌어져 크게 활약한 내용을

이순신장군은 무의공을 칭찬했다.

 

 방답 첨사 이순신은 일본군 대선 1척을 바다 가운데에서 완전히 사로잡았고, 일본군 4명을 베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 적을 쏘아 죽이는 것만 힘썼을 뿐, 머리를 베는 것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또한 적선 2척을 추격해 부수고 불태웠습니다.

 

머리 수급에 따라 공을 평가하는 시기에 무의공은 공적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왜군을 격파하는데 앞장서는 것을 칭찬한 것이다.

159291일 부산해전에서도 무의공은 선봉인 전부장으로 참전해 왜군을 무찌르는데 공을 세웠으나,

다른 부장들에 비해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자 이순신장군은 조정에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많은 장수들 중에서도 순천 부사 권준, 광양 현감 어영담, 흥양 현감 배흥립, 녹도 만호 정운, 그리고 방답 첨사 이순신 등은 특별히 신뢰할 수 있어 함께 죽기를 약속하고 모든 일을 같이 의논하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권준과 다른 장수들은 모두 당상관(3품 절충장군 이상)으로 승진했는데, 이순신만이 은혜를 입지 못했습니다.

 

이순신장군은 언제나 최선을 다했던 무의공에게 신뢰가 두터웠다.

그 후 무의공은 1594년에는 충청 수사로,

정유재란 후 이순신장군이 3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을 받자 바로 찾아와 함께 전투에 참여했다.

1597년에는 명량 해전이 끝난 직후 경상 우수사에 임명되었으며,

1598년 이순신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에 중위장으로 참전해

이순신장군과 함께 임진왜란의 시작과 끝을 함께 했다.

묘소는 현재 경기도 광명시 일직동에 있다.



무의공 묘 전경



무의공의 뜻을 기려 잠수함의 이름이 이순신함이다. 충무공 이순신장군은 구축함 이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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