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인물여지도

정문부장군

윤의사 2020. 3. 23. 16:31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함경도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진군하였다.

선조가 의주로 피난을 간 것과 달리 선조의 첫째 아들인 임해군은 함경도 회령으로 피난을 갔다.

이때 죄를 짓고 이곳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아전 국경인(鞠景仁) 국세필(鞠世弼) 숙질이 왜군과 내통하여

임해군을 가토에게 넘겨주고, 그 대가로 일본의 병사(兵使) 벼슬을 얻어 회령(會寧)과 경성(鏡城) 고을을 다스렸다. 이를 보고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는 의병 100여명을 모집하여 국경인과 국세인 숙질을 비롯하여 일본과 결탁한 두만강 근처의 친일파들을 모조리 잡아 처형했다.
그러자 정문부를 따르는 의병수가 7000명으로 늘어났다. 정문부는 길주성에 머무는 왜군을 공격하러 가다가, 조선 의병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성을 빠져나오던 왜군을 크게 물리쳤다. 이에 왜군이 길주성으로 들어가자 정문부는 성을 완전 포위하였다. 성안에 갖힌 일본군은 추위에 얼어죽는 사람이 나왔고, 땔감과 군량이 부족하니 길주성을 버리고 마천령으로 넘어갔다. 정문부는 도망가는 적을 쫓아 단천 말티고개에서 세 번에 걸친 싸움 끝에 왜군을 물리쳤다. 이로써 정문부가 함경도지방을 왜군으로부터 완전히 회복했는데 이를 통틀어 ‘북관대첩(北關大捷)'이라 한다. 당시 이들 길주지역에서의 전투는 정문부 의병대장의 탁월한 지략과 전술에 의해 임진왜란 전쟁사에 길이 남을만한 큰 승리로 평가받고 있으며, 조선조 숙종때 이 전투를 기념하여 함경북도 길주에 북관대첩비가 세워졌다. 정문부는 왜군을 몰아낸 후 백성들에게 공평한 세금과 부역을 부과하면서 어려운 백성들을 살피는데 힘썼다.
원래 함경도는 이징옥과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킨 후에 중앙으로부터 차별을 많이 받아 의병이 일어나기 어려운 지역이었다. 그러나 정문부의 신망을 바탕으로 의병이 일어났고 왜군을 물리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정문부는 임진왜란이후에 장례원판결사, 호조참의, 예조참판, 동지중추부사 등의 벼슬을 했으며, 1615년 병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당시의 당쟁에 몰두하는 정치를 비판하며 거절했다.
1624년에 이괄의 난때 윤탁연의 모함으로 모진 고문받던 중 이를 견디지 못하고 60세의 일기로 끝내 숨을 거두었다다가, 후에 신원되어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일본은 러일전쟁 중에 임진왜란 중 관군도 아닌 의병에게 당한 치욕적인 패배를 감추려 북관대첩비를 가져가 침략 역사의 상징인 야스쿠니신사에다 그대로 방치하였다.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의 속내를 보는 듯하다.
우리나라의 영광과 아픔을 간직했던 북관대첩비는 2005년 환수되어 2006년 3월1일 북한으로 인도되었다. 우리나라에는 경복궁, 독립기념관, 의정부 정문부장군묘역에 복제품이 서 있다.


고궁박물관 옆에 있는 1호복제 북관대첩비

독립기념관에 있는 2호복제 북관대첩비

정문부장군묘역에 있는 3호복제 북관대첩비


정문부장군 묘


'보고 배우는 인물사 > 인물여지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의공 이순신  (0) 2020.04.15
표암 강세황  (0) 2020.03.28
지석영  (0) 2020.03.21
허준  (0) 2020.03.20
이원익  (0) 2020.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