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인물여지도

김육

윤의사 2020. 3. 18. 17:33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경강로 399번길)에 김육선생의 묘가 있다.

김육선생은 양란 이후에 어려운 민초들을 위한 정치를 펼치려 했으며,

실물 경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공허한 민족주의나 명분보다는 실리주의를 주장하다 보니

중화 사상에 젖어있는 서인의 중심 인물인

김장생의 반대(부담이 결코 가볍지 않음, 다른 세금을 거두어 들여야 함,

운반 비용이 백성들에게 고통이 됨), 그리고 송시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동법을 실시하려고 했다.

그의 대동(大同) 사상은 유교의 이상 사회인 온 세상이 태평하고 화평한 사회,

큰 세력이 합하는 사회, 조금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평등한 사회

구현하려고 애를 썼다.

, 민생을 구하려 노력했고, 실물 경제를 펼치려고 했으며,

한족 중심의 민족주의에 빠져 명분을 중시한 친명사상을 깨려고 노력했다.

그의 사상은 <잠곡유고>에 나타나 있다.

 

관직의 높고 낮음을 따질 것 없이 진실로 그 뜻을 시행하는 데 뜻을 두고 있다면,

성현들이 한 말을 법으로 삼아야만 한다.

그리하여 한 고을에 시행하면 한 고을의 백성이 편안하고,

한 나라에 시행하면 한 나라의 백성이 편안하며,

온 천하에 시행하면 온 천하의 백성이 편안해져야 한다.

 마음을 바르게 하고, 자신을 닦고,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도는,

바로 성현들이 사람들에게 가르친 법으로, 백성에게 은택이 돌아가게 한 것일 뿐이다.(중략)

나는 흐리멍덩하고 천박하여 학문이란 것이 과연 어떠한 것인지 잘 모른다.

내가 원하는 것은 바른 마음을 가지고 실제적인 일을 하는 것이며,

쓰임을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요역을 줄여 세금을 적게 거두는 것이다.

나는 헛되이 이상만을 추구하거나 형식적인 것을 숭상하지 않으려고 한다.

 

김육 선생은 오직 민초들만을 보고 개혁을 하려고 했음을 보여준다 

임경업 장군이 용골 산성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안타까운 마음을 나타낸 시이다.

       

제일 험준하다는 용골 산성은 바닷가를 지키는 외톨이 산성/

관서의 장한 기개 지켜내어 살수 이북 충신이 주둔했다네/

군량의 위급함을 구원해주지 못해 마침내 전투에 지고 말았구나/

나라가 힘든 이때 마땅한 계책이 없어 일이 닥칠 때마다 눈물만 훔친다네

 

병자호란의 결과 청나라에 인질로 갔던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귀국하며 감회를 나타낸 시이다.

 

배로 가자니 사나운 바람이 두렵고/

육로로 가자니 장맛비가 걱정이구료/

세상 길 오가며 괴로운 일이/

막아선 산과 시내가 있어서만은 아니라네/

낯선 땅에서 나그네로 떠돈 지도/

어느 새 일 년 반이 훌쩍 넘었네/

초가을날 돌아갈 짐을 꾸리지만/

돌아가고 싶은 생각 날개 돋힌 듯 하네.





김육선생 초상화(실학박물관)

김육선생 묘

신도비

익산시 용안면의 김육선생 불망비로 1659년 4월에 민초들이 세웠다.

'송하한유도'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김육선생의 학자적 풍모를 흠모한 호병이라는 명나라 화가가 그린 것이다.

<잠곡조경일록>은 영의정 이만영을 따라 명나라로 간 마지막 사신으로 1년 정도 머물며 느낀

1년간의 일기로, 대동법과 시헌력 시행의 기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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