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인물여지도

종기 의관 피재길

윤의사 2020. 2. 29. 16:13

정조는 종기로 고생을 하였으며,

종기 때문에 세상을 떠났다(시해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정조의 종기를 고쳐주고 중인에서 일약 종6품의 벼슬이 내려진 사람이 있다.

바로 피재길이다.


옛날 우리나라 백성들은 위생 환경이 좋지 않아 종기(부스럼)가 많았다

심하면 죽기까지 하는 질병이었다.

감염병인 코비드 19처럼 전염되지는 않지만

옛날 우리 조상들이 가장 무서워하던 질병 가운데 하나였다. 

종기 치료의 획기적 변화를 가져온 사람은 마의(말을 관리하던 수의사) 출신의 백광현이다.

그는 종기를 침으로 째서 외과적으로 처음 치료하여 이름을 날렸다.


피재길의 아버지는 피홍즙으로 백광현과 달리 약을 써서 종기를 고쳤다.

그러나 피홍즙은 피재길이 어릴 때 세상을 떠났다.

피재길이 아버지로부터 의술을 이어받기도 전이었다.

피재길은 아버지의 약 만드는 법을 어깨 너머로 배운 어머니에게서 

약을 만드는 법을 이어받았다.

피재길은 약을 만들어 시장과 가정을 돌아다니며 팔아

종기약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1793년에 정조는 종기가 심하였다.

특히 여름이기에 정조는 더욱 고통스러웠다.

전의감이 아무리 애를 써도 약은 소용이 없었다.

피재길의 소문을 들은 사관의 추천으로 정조를 진찰할 수 있었다.

정조의 상태를 파악한 피재길은 웅담을 여러 가지 약재와 함께 고아서 고약을 만들어 붙였다.

정조가 “며칠이면 낫겠느냐?”고 묻자,

“하루면 통증이 멎고, 사흘이면 다 나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피재길의 말대로 3일만에 완쾌된 정조는 약원에 유지를 내렸다.
“전해 오는 약에서 조금 벗어나긴 했지만, 그동안의 괴로움을 다 잊게 해주었다. 요즘 세상에 뜻밖에도 숨은 솜씨와 비장된 의서가 있으니, 의원도 명의라 말할 만하고, 약도 신약이라 말할 만하다. 그의 수고를 갚을 방법을 의논하라.
약원의 신하들이 “우선 내침의를 맡게 하고 6품을 내린 뒤에 벼슬을 주십시오.”라고 청하였다.

정조가 허락하고 즉시 나주 감목관으로 임명하였다.

감목관은 대개 수령이 겸하였으므로 중인인 피재길을 후에 수령으로 임명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피재길의 운명은 1800년 6월에 정조의 종기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정조의 종기는 시간이 갈수록 더하여 붓기는 연적만큼 커졌다고 한다.

피재길이 아무리 약을 써서 붙여도 소용이 없이

발병 4일 만인 6월28일에 세상을 떠났다.

피재길은 '임금을 시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함경도 무산으로 유배를 떠났다가,

순조 3년(1803) 2월6일에야 대왕대비의 명으로 대사령이 내려 무산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이후 피재길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고 있다.


고약하면 이명래고약이 생각난다.

공세리 성당을 지은 외방선교회 에밀 드비즈신부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종기로 고생하는 것을 보고

서양 약학과 한의학을 종합하여 고약을 만들어, 공세리성당 신도였던 요한 이명래에게 전수하였다.

처음에 드비즈 신부의 한국 이름을 따서 성일론(成一論) 고약이라고 불렸다가,

이명래가 이 고약에 민간요법을 더해 1906년 아산에서 이명래고약집을 열면서 유명해졌다.

둘째 자녀인 이용재님과 사위들을 거치며 지금도 사용하기 좋게 나오고 있다.

종기치료제로 우리나라 백성들의 부스럼을 치료하듯이

하루빨리 코비드19의 치료제가 나오길...


1940년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 부근에서 고약 처방을 하는 이명래


사진 출처(천우신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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