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근,현대사 영웅만들기

태화관

윤의사 2020. 2. 9. 10:26

3.1운동 때 33인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곳이 태화관이라는 것을 안다.

원래는 독립선언서를 탑골공원에서 낭독하려고 했지만, 직전에 태화관으로 옮겼다.

태화관은 순조의 장녀 명온공주와 부마 김현근이 거주하던 죽동궁이다.

김현근이 몸이 약해 병을 앓으니 무당을 불러 대나무로 칼춤을 추면서 낫기를 기원하였기에

죽도궁(竹刀宮)’이라고 불리웠다가 죽동궁이 되었다.

  

죽동궁 표지석

 

명성황후와 민영익도 살기도 햇다. 그 후에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도 살았다.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이 사는 집임을 하늘도 알았는지 벼락이 쳤다.

자신을 위협하는 사람들도 많은 때에 하늘까지도 노하니 이완용은 공포에 떨면서 집을 팔았다.

이를 명월관의 주인인 궁중 요리사 출신인 안수남이 사서 분점으로 태화관을 열었던 것이다.

손병희를 비롯한 민족대표들은 이곳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이완용을 비롯한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의 행위를 무효화하려고 했던 것이다.

민족 대표는 33인을 뽑았다.

원래 2000만 국민들을 대표하여 200명으로 하려다가 참여 인원이 줄어 33인으로 했다.

312를 합한 수 이다. 그래서 음과 양을 대표한 수라고 한다.

그러므로 33은 모든 수를 대표하는 숫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조선시대에 통행금지 해제를 알리는 파루에 33번의 종을 울렸다.

최린의 소개로 태화관에서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려고 하자, 안수남이 항의하였다.

이에 한용운선생이 야단을 치며 그렇게 두려우면 신고하시오.”라고 했다.

결국 안수남의 신고로 일본 경찰이 와서 29명의 독립 투사들은 잡혀갔다.

비폭력으로 진행된 3.1운동은 실패하였지만,

독립운동의 중심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일본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서로 갈라놓기 위한 이간책으로

무단통치(헌병경찰통치)에서 문화정치로 바꾸었다.

그 뒤 이 터는 남감리교가 땅을 사서 태화기독교 사회관으로 지어졌다가

도시개발에 의해 현재의 태화빌딩이 자리잡았다.

태화빌딩 로비에는 33인이 회의하는 모습이 걸려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29인이다.

독립선언 현장에 참여하다가 일본의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 1명은 외국으로,

3명은 시골로 도망가서 29명이 참여한 것이라고 한다.

       


3.1운동 유적지 표지석, 1982년 처음 건립되었다가 1997년에 다시 세웠다.

  



      태화관 로비에 있는 33인과 실제 33인 사진


태화빌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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