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근,현대사 영웅만들기

거지성자 손정도

윤의사 2019. 12. 25. 11:36

1872726일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 오흥리에서
손형준과 오신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유교가문이며 부유한 환경이었다.
1902년에는 과거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평양으로 가다

날이 저물어 한 가정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 집이 기독교 목사 집이라,

목사로부터 신학문과 서구 문화, 그리고 기독교에 대해 들었다.

이에 감명을 받은 손정도는 유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상투를 자르고 집으로 돌아온 손정도는 집안에 모셔진

조상의 신주를 매장하고, 사당을 부서서 집안 어른들로부터 쫓겨났다고 한다.

숭실중학교를 거쳐 1909년 진남포 신흥리 교회의 전도사로 있으면서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손정도 목사는 감리교 목회자로 1910년에는 만주에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1912년 하얼빈에서 조선총독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암살모의에

관여했다고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전라남도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1914년에 석방되었다.
19146 정동교회의 목사로 있으면서 수많은 조선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어

많은 신자들을 끌어모으기도 했다.

고종의 밀명으로 하란사, 고종의 5남 이강과 함께 만국평화회의에

비밀리에 참여하려고 했으나, 고종과 하란사의 죽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3.1운동 계획에 참여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상하이로 망명하여 '현순', 안창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의 기초를 쌓았다.

이승만을 임시정부에 참여하게 하여 대통령이 되게 하였으며,

2대 임시의정원 의장을 맡았으나, 분열된 모습에 실망을 하기도 했다.

김구 등과 함께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용단'을 조직했으며,

세계에 독립 진정서를 보내는 등의 호소를 하였다.

가난한 한국인을 위해 애쓰면서

미래에는 산업사회로 과학이 중요할 것이니 이에 대한 대비를 하라고도 했다.

1912년 옥고의 후유증을 달고 살다가 19316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이 우리나라 해군 초대 제독인 손원일로

해군의 기초를 닦았다.

손정도 목사가 걸레성자로 불린 것은 통일과 역사연구소 김형석 박사가 전하는 말이 정답일 것 같다.

소위 남도 사람과 북도 사람, 그리고 영남과 호남, 이런 갈등들을 보면서 굉장히 애통해 하는 거죠.

우린 독립운동 하려고 왔는데 해놓은 것은 없고 적을 이롭게 한다, 이렇게 분열해서 어떡하겠냐?

이런 여러 가지 파쟁, 분열, 이걸 갖다가 허물을 덮기 위해서 그 분의 유명한 걸레철학이 나오는 거죠.

내가 걸레가 되어서 이런 걸 다 덮겠다.”




손정도 목사

안창호선생과 함께

오늘날 정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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