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인물여지도

대구 삼절, 염농산2

윤의사 2019. 12. 28. 19:20

염농산은 평소 후배 기생들에게 말했다.

기생은 돈 많은 사람만을 바라보아서는 안된다. 지금 우리나라는 왜놈들을 비롯한 나쁜 사람들을 내쫓고

국권을 회복하는데 한 몸을 바쳐야 한다.”

이렇게 기생들에게 나라의 중요성과 국권회복을 강조했기에 대구삼절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1907년에 서상돈(徐相敦, 1850~1913)의 제안으로 대구에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은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본에 진 빚을 갚고자 처음에 담배를 피지 않고 술을 먹지 않으면서 일본에 진 빚을 갚자고 했다. 왜놈들이 돈을 구실로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한다는 사실에 분노하였다. 후배 기생들을 모아 염농산이 말했다.

  

이 나라가 남자들만의 나라입니까? 우리도 금반지, 목걸이, 팔찌를 내놓아 나라의 빚을 갚는데 앞장섭시다.”


염농산은 나이는 19세로 어렸지만 서상돈, 김광제가 주도한 국채보상운동에 네 번째로 당시에 집 한 채 값인 100원을 기금으로 내 화제가 되었다. 190726일 대한매일신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1907221일 대구에서 촉발된 국채보상운동에 대구 기생 앵무는 당시 큰 돈인 100원을 의연금으로 내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앵무는 금번 국채보상은 국민 의무이거늘 여자로서 감히 남자보다 일분이라도 더 낼 수 없으니 누구든지 기천원을 출연하면 나도 그만큼 출연하겠다.”


고 선언했다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기사는 한국 근대사에서 모든 일을 남성중심으로 하던 것에 대한 여성의 공개 도전이었으며, 이 기사가 나가면서 남성들이 많은 기금을 내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특히 여성들의 참여와 진주와 평양의 기생을 비롯한 전국 기생들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국채보상운동기념비(대구국채보상기념관 제공)


국채보상기념 어록비(독립기념관)

   

  1908년에는 경상북도 관찰사로 박중양(朴重陽, 1874-1955)이 부임하였다. 그는 조선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수양아들이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부인이 바다에 빠졌을 때 그녀를 구해주었다. 그럼에도 박중양은 어떠한 사례도 귀한 선물도 사양하였다. 이에 감동한 이토 히로부미가 박중양을 수양아들로 삼은 것이었다. 1900년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공부하면서 친일파로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에 앞장선 인물이다.

그는 관찰사로 부임하자마자 대구를 상징하는 역사적인 유적인 대구읍성을 허물고, 읍성의 6개의 문, 관덕정, 영영축성비, 대구부수성비 등과 관리들이 출장을 오갈 때 머물던 태평관까지도 철거하려고 하였다. 고종황제는 분노하였다. 고종의 분노가 대구까지 전해지자 염농산은 후배 기생들을 불러모았다.

얘들아, 지금 황제폐하까지도 반대하는 일을 일개 관찰사가 대구의 역사를 파괴하려고 한다. 우리가 돈 많은 사람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불의가 있으면 그것을 막으려고 당당하게 맞서야 한다.”

염농산은 뜻을 같이하는 동생 비취와 기생들, 그리고 지역주민들과 함께 대구 관아로 가서 학생들처럼 권당(捲堂)을 하였다. 옛날 학생들의 시위를 보통 권당이라고 하였다.

염농산과 기생 및 지역주민들은 호곡권당을 하였다.

아이고! 아이고!”

황제폐하의 명령도 거부하는 관찰사가 웬 말이냐?”

호곡권당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자 박중양은 당황하였다.

이것들을, 내 말을 거역하는 저것들을 쫓아내라. 만약 명령을 거부하는 자들은 당장 감옥에 가두거라.”

이토 히로부미를 등에 업고 박중양은 염농산과 비취, 지역주민들을 총으로 위협하며 쫓아냈다.

그리하여 박중양의 뜻대로 대구를 상징하는 읍성을 비롯한 건축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염농산은 대구 관기에서 독립을 하여 달성권번의 으뜸 기생이 되었다.

후배기생들의 선생님이 되어 가르침을 주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염농산이 자란 성주군이 물바다가 되어 엉망진창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원래 성주군은 산으로 둘러쌓인 분지이다.

하지만 용암면은 두리방천을 끼고 발달한 충적평야가 10km에 이를 정도로 넓다.

이곳에서 벼농사를 지으며 평화롭게 살던 주민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홍수와 가뭄이다.

봄에 가뭄이 들면 모내기를 해야 하는데 모내기를 하지 못하니 힘들고,

모내기를 한 후 7월에서 9월에는 홍수가 와서 애써 지어놓은 농사를 몽땅 망쳐버리기 일쑤였다.

이 소식에 염농산은 용암면에 사람을 보냈다. 면장을 찾아 3,000원을 선뜻 내놓았다.

3,000원은 오늘날 30억원에 달하는 큰 돈이었다.

염농산이 거액을 내놓아 제방을 쌓으라고 했다는 말에 용암면 주민들은 팔을 걷고 너도 나도 제방 쌓는 일에 나섰다. 그리하여 홍수가 나도, 가뭄이 들어도 농민들은 걱정없이 생활을 하게 되었다.

제방이 완성되던 날,

염농산은 음식을 만들어 그동안 고생한 농민들을 위로하였다. 그리고 학춤을 추면서 축하해주었다.

<염농산 제언 공덕비>는 염농산이 두리방천을 쌓은 공덕을 기념하며 세운 비석인 것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성주군 용암면 두리방천 복구로 생긴 너른 들판을 "새내(新川)"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나이가 드신 분들은 "앵무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달성권번으로 돌아온 염농산은 판소리를 연구하였다.

우리나라 판소리는 12마당이 전했으나, 고종 때 전라북도 고창에 사는 신재효가 여섯 마당으로 정리하면서 제자들을 키워내고 있었다. 여섯 마당은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토끼타령, 적벽가, 가루지기타령이다. 사실상 대구는 판소리를 배우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워낙 음악성이 뛰어난 염농산은 대구를 영남지방의 판소리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녀의 제자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명창 박녹주(朴綠珠, 1905-1979)이다. 박녹주명창은 14세 때인 1918년 대구로 내려와 염농산한테 춤과 시조, 노래를 배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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