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문화사전/밥상 위의 한국사

도토리

윤의사 2019. 10. 11. 18:52

고구마와 감자가 들어오기 전의 대표적인 구황작물은 도토리이다.

우리 민족은 신석기시대부터 도토리를 먹기 시작하였다.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서울시 강동구 암사동이나 경기도 하남시 미사동 등

많은 신석기 유적지에서 자연산 도토리가 나오는 것을 통해 추측할 수 있다.

도토리가 대표적인 구황작물이라는 것은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고려사에는 충선왕이 흉년이 들자 백성을 생각해 다른 반찬의 수를 줄이고 도토리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도 도토리는 대표적인 구황작물이었다.

<태종실록> 17, 태종 9(1409) 316일의 기사를 보면

 

강원도의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구휼품을 나누어주어 구제하였다. 도관찰사가 임금에게 진언하기를,

"굶주린 백성이 도토리[橡實]를 주어 연명하는데, 도토리가 이미 다 없어졌고, 의창에 저장한 곡식도 구제하기에 부족합니다. 원컨대, 국고의 곡식을 내어 흉년을 구제하고 농사를 권장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한 <세종실록> 세종실록 25, 세종 6(1424) 820일 기사에는

 

호조에서 계하기를,

"농사가 흉년이 든 각 고을의 구황할 풀과 나무뿌리는 정한 수량이 없기 때문에, 많을 때는 일을 일을 아주 그만두거나 없애기에 이르고, 적을 때는 흉년을 구제하지 못하게 되오니, 지금부터 대호(大戶)에는 60, 중호(中戶)에는 40, 소호(小戶)에는 20, 잔호(殘戶)에는 10석으로 일정한 수량을 정하여서 도토리[橡實]를 예비하게 하고, 농사가 비교적 잘 된 각 고을은 반드시 수량에 구애되지 말고 적당하게 예비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러한 실록의 기사로 미루어 고구마나 감자가 전래되기 전

도토리가 대표적인 구황작물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 후기에 쓰인 홍만선이 저술한 산림경제, 정약용이 저술한 목민심서등에도

도토리는 대표적인 구황식품으로 소개되고 있다.

현대에 들어서서도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도토리는 굶주린 사람들의 배를 채워주는 소중한 음식이었다.
도토리는 오늘날 건강식품으로 여전히 각광받고 있다.

특히 다이어트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도토리는 칼로리는 낮으면서

배가 부르는 포만감을 주는 식품이기 때문이다.

구황작물의 대변신이라고 할 수 있다.


도토리묵무침  


도토리 나무

 

도토리로 만드는 대표적인 음식이 도토리묵이다. 9월부터 산에 떨어진 도토리를 햇볕에 바싹 말린 후 옛날에는 맷돌을 이용하여 껍질을 까고 장독에 물을 담고 도토리를 넣은 후 물을 갈아주면서 떫은 맛이 없어질 때까지 우려낸다. 그 다음 곱게 갈아 고운 체에 밭쳐 앙금을 가라앉히면 도토리 녹말이 완성된다. 도토리녹말을 물에 풀어 하루 밤 정도 두었다가 솥에 붓고 저어가며 끓인다. 색깔이 투명해지면 소금과 식용유를 적당량 넣고 고루 저으면서 다시 한번 끓여 뜸을 들인 다음 적당한 그릇에 쏟아 식히면 묵이 된다. 녹말 가루는 민간요법으로 설사에 특효가 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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