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문화사전/밥상 위의 한국사

시험칠 때 엿먹는 이유

윤의사 2019. 7. 28. 20:40



시험에 대한 징크스는 옛날에도 대단했던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 과거시험이 실시된 것은 고려 광종이후이다. 그리고 성종이후 유학이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확립되면서 과거시험에 대한 중용성은 더욱 커져갔다.

조선시대에 들어서서는 성리학이 점차 나라의 중심 사상이 되어 과거시험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고려시대에 비하여 조상의 음덕으로 관리가 되는 음서보다 과거라는 시험을 통하여 관리가 되는 것을 집안의 경사로 여겼다. 더구나 음서로 관리가 되는 사람들을 과거시험을 통해서 관리가 된 사람들이 따돌리기까지 하였다. 나아가 음서를 통해 관리가 되는 사람은 승진하기도 어려웠다.

이에 조선시대 선비들은 과거에 목을 멜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문경새재가 있는 영남대로는 '과거길' '성공길' '출세길'로 생각한 반면, 강진, 해남, 진도 등으로 향하는 호남의 예길인 삼남대로는 '유배길'로 생각하였다고 한다. 특히 문경새재는 선비들에게 인기있는 길이었다.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데 세 고개가 있다. 문경새재(조령)과 추풍령, 죽령이다. 추풍령이나 죽령은 선비들이 넘기를 꺼리는 길이었다. ‘추풍령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고 생각하여 과거 시험에서 떨어지는 길이요, ‘죽령과거에서 죽죽 미끄러진다.’고 생각하여 꺼리던 길이다. 부득이하게 추풍령을 넘으려는 사람은 그 옆쪽의 괘방령을 넘었다고 한다. 반면에 문경새재는 문경(聞慶)’'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뜻이고 옛 이름이었던 문희(聞喜) 역시 '기쁜 소식을 듣는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조령새재역시 새도 넘기 힘든 고개를 말하니 문경새재를 넘었다고 하는 것은 승승장구한다.’는 생각으로 선비들에게 자신감을 주었을 것이다.


문경새재



문경새재는 조선 태종 14(1414) 나라에서 영남대로(한양~동래)로 개척한 길 중 문경과 충북 괴산을 연결하는 고갯길이었다.

보통 동래에서 한양까지 가장 짧게 걸리는 길도 문경새재였기에 선비들에게 인기도 있었을 것이다. 문경새재를 거치면 14, 죽령은 15, 추풍령은 16일이 걸렸다.

요즈음에 시험을 보기 전에 꼭 붙으라고 엿이나 찹쌀떡을 선물로 주는 일이 많다. 심지어 엿뿐만이 아니고 잘 찍으라고 포크를 준다거나, 잘 풀라고 휴지를 주기도 하며, 심지어 잘 풀리라고 실을 주거나, 잘 보라고 거울을 주는 등 다양해졌다. 또한 가서 돼라는 뜻에서 카스텔라를 선물하기도 한다. 그리고 시험을 보는 장소의 문이나 기둥에 엿을 붙여서 청소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려움에 빠지게 하는 경우도 있다.

옛날에도 엿을 먹거나 엿을 기둥에 붙이는 것은 오늘날이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풍습이 나오게 된 까닭은 전설에 의한 것이다.

전설이 생겨난 지역도 바로 문경새재이다. 문경새재를 하루에 넘기는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문경새재의 정상인 조령고개에는 숙박시설이 있었다. 관리들이야 나라에서 지어 관리하던 관이나 역, 원에서 숙박을 하였다. 조령에도 관리들의 출장길에 숙식의 편의를 제공했던 공익시설인 조령원이 터만 남아 있다가 지금은 복원을 해놓았다. 관리들과 달리 일반인들은 주막이나 객주에서 하룻밤을 지내야 했다. 이러한 주막과 객주는 따로 숙박료는 받지 않으면서 술이나 밥을 주로 팔았다. 또한 양반이나 상민, 천민 구분없이 먼저 오는 사람이 아랫목을 차지하면 그만인 조선시대 유일의 신분 차별 없는 장소였다.

조령 고개 정상에 엿을 파는 할머니가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들을 상대로 엿을 팔고 있었다. 사람들은 무심하게 지나갔는데, 한 선비가 할머니로부터 엿을 사먹고 과거에 합격한 후에 과거 시험을 보기 전에 엿을 먹거나, 과거 시험장의 기둥에 엿을 붙이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달리 전하는 것으로는 남편이 과거 시험을 볼 때에 아내의 도움을 나타내는 데에 그 기준을 엿으로 삼았다고 한다. 즉 선비들이 과거 시험을 보러 가기 위해 하룻밤을 주막집에 머물 때에 아내가 정성을 다해 밤을 세워 만들어준 엿을 길게 늘였다. 이 때 그 빛깔이 희면 휠수록 그 부인이 남편 뒷바라지를 잘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시험장에 엿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과거 시험을 보느라 머리를 쓰다 보면 많은 에너지가 없어져 이를 보충하는 데에 설탕이 많은 엿이 많이 들어 있는 엿이 건강에 좋다는 우리 조상들의 과학적인 생각을 담고 있는 것이다.

문경새재에서 엿을 사먹고 과거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은 빠르게 전국에 퍼졌다. 그리하여 호남지방에 살던 선비들도 일부러 문경새재를 넘어 엿을 사먹고 한양을로 향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아마도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갈 때는 과거시험의 합격에 대한 열망이 가득 담겨 있을 것이요, 문경새재를 넘어 영남 지방으로 올 때는 낙담하는 사람과 합격의 영광을 함께 하려는 사람들로 나누어 졌을 것이다. 영남에서 한양으로 올라가 과거시험에 합격하는 비율은 13%내외라고 한다. 10명 중 겨우 한 명정도가 합격하고 나머지는 눈물을 머금어야만 했다. 그래서 문경새재에는 낙방의 아픔을 시로 지은 사람이 있다.

 

조선후기의 학자이자 미산유고(味山遺稿)를 남긴 박득녕(18081886)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해마다 올라오는 한양이었으나

금년처럼 우울하고 쓸쓸한 여행 길은 없었다.

길동무도 없이 가는 발길이

너무 무겁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을 일으키고, 정묘호란 때에는 군사를 일으키면서 인조를 호종했던 유우잠(1575~1635)도 과거에서 쓴 잔을 마신 적이 있는 모양이다.

 

지난해 새재에서 비를 만나 묵었더니,

올해는 새재에서 비를 만나 지나갔네.

해마다 여름비 해마다 과객신세,

필경엔 허황한 명성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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