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문화사전/밥상 위의 한국사

계영배

윤의사 2019. 7. 24. 20:44

임상옥은 정조 3(1779) 1210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아버지 임봉핵의 아들로 태어났다.

임상옥의 집안은 원래 평안남도 안주에서 살다가 그의 증조할아버지 때 의주로 이사하였는데,

그때부터 상업에 종사하였으며,

그의 아버지 임봉핵도 역시 중국을 오가면서 물건을 사고 팔던 상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장사에서 실패를 거듭하였다.

그리하여 그 빚이 고스란히 임상옥에게 전해졌고, 이를 갚느라 그는 많은 고생을 하며 장사를 배웠다.

당시에는 개성의 송상, 서울의 경강상인, 평양의 유상, 동래의 내상과 더불어 의주의 만상이 조선의 상업을 주름잡았다. 임상옥은 바로 의주의 만상에서 밑바닥부터 장사 기술을 배워나갔다. 그는 생각하였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인삼 무역권을 잡아야 해.”

그리하여 이조판서 박종경의 정치적 권력을 배경삼아

우리나라 최초로 국경지방에서 인삼의 무역권을 독점하였다.

이때부터 천재적인 상업수완을 발휘하여 1821(순조 21) 변무사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갔을 때

북경상인들의 불매동맹을 교묘한 방법으로 분쇄하고 원가의 수십 배로 매각하는 등 막대한 재화를 벌었다.

당대 최고의 부호로 손꼽힌 임상옥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 지를 전하는 일화가 많다.

그의 사무실에서 회계를 맡아보는 사람들만 해도 70명이 넘었다고 한다.

또 그의 집에 원접사, 평안감사. 의주부사가 한꺼번에 방문했을 때 그 일행이 700명이나 되었다.

이때 임상옥은 그들 모두에게 한 사람 앞에 한 상씩 차려 한꺼번에 제공했다.

음식도 음식이려니와 그릇을 비롯한 기구 일체가 놀라울 만큼 호화롭게 구비되어 있었다.

순조 11(1811) 홍경래의 난 때에는 방수장으로 성을 지키는 데 공을 세웠으며,

변무사의 수행원으로 연경에 다녀온 뒤 오위장과 전라감영의 중군으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홍경래의 난이 오래 계속되었고, 농사가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고생을 하자,

그는 소금과 식량을 구하여 백성들을 구하는데도 앞장섰다.

이 공으로 1832년 곽산군수가 되었다.

그는 약 1년 동안 이 자리에 있으면서 백성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장사를 통해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농사를 지을 때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는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지도하였다.

산골에 위치해 항상 보리 고개를 걱정하던 곽산 사람들은 임상옥의 다스림을 고마워하였다.

임상옥 때문에 보리 고개의 걱정을 잊고 생활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조 34(1834) 7월에 물난리가 일어나 1737가구의 농민들이 피해를 입었고,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16명에 물에 떠내려간 집이 2천 가구에 이르렀다.

백성들의 고통은 매우 심하였다.

집이 없어 고생하는 사람들,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났다.

그는 자신의 창고의 문을 활짝 열었다.

사람들이 필요한 만큼 의주의 수재민들에게 식량과 의복을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전국에 있는 의주 만상의 행상들을 통해 부족한 식량과 의복을 구하였다.

급히 의주로 구해온 식량과 의복들은 물난리를 겪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졌다.

의주의 물난리를 겪은 사람들을 구한 공으로 이듬해 구성부사에 발탁되었다.

4품에서 3품으로 뛰어 오르는 큰 승진이었다.

그러자 비변사에서 논란이 일었다.

임상옥이 곽산군수로 있을 때

포폄(관리로 있는 동안에 승진을 할 수 있는지를 따지는 점수를 매기는 것)

중간으로 승진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왔다.

비변사에서의 논란은 임상옥으로 하여금 벼슬에 대한 그의 뜻을 꺾게 만들었다.

는 곧 사퇴하고 빈민을 구제하는데 앞장섰다. 늘 과객과 걸인들을 맞이하여 숙소와 음식 대접을 잘했다.

주위에 어려운 일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늘 도와주었다.

많은 돈을 내어 도로와 다리를 놓고 배를 사서 교통을 편리하게 하기도 하였다.

1천 여 석의 곡식을 사서 백마산성 수비군에게 제공하여 도둑의 방비에도 힘을 쏟았다.

임상옥은 시를 짓는데도 남다른 재주를 보였다.

그는 시를 잘 지었으며 일생 동안 지은 시를 추려 적중일기를 엮었다.

그 밖에 저서로 가포집이 있다.

임상옥은 철종 6(1855)에 토지를 개인적으로 물려주지 않고

여러 사람에게 함께 공유지로 물려주어 재산을 지킬 수 있도록 하면서

남을 많이 도울 것을 후손들에게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그는 양반만 제사를 지낼 수 있는 학봉사에 위패를 모셔졌다.

임상옥은 장사를 하면서 깨달은 것은 바로 '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이었다.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라는

그의 유언은 물과 같이 평등한 재물을 독점하려는 어리석은 재산가는

반드시 그 재물에 의해서 비극을 맞을 것이며,

저울과 같이 바르고 정직하지 못한 재산가는

언젠가는 반드시 그 재물에 의해서 파멸을 맞을 것이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임상옥이 장사를 하면서 늘 곁에 두고 있었던 것은 계영배(戒盈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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