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문화사전/우리역사문화사전

옛날에도 군의관이 있었나요?

윤의사 2013. 1. 16. 14:25

이순신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적의 총탄을 맞아 위독했을 때,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바로 ‘심약’이다.

조선시대에는 궁중에서 의약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인 전의감(殿醫監)과

의약과 일반 서민에 대한 치료를 맡아보던 혜민서(惠民署)가 있었다.

이곳에 소속된 관리 중 ‘심약(審藥)’이 있었다.

평소에는 궁중에 바치는 약재(藥材)를 조사하기 위하여 8도에 파견되는 종9품의 벼슬아치인데,

전쟁이 일어나면 각 군에 소속이 되어 부상당한 군인의 치료를 담당했다.

이들은 비상약으로 소화제, 대자석(代赭石:갑옷에 물을 들이거나 부상 부위를 치료하는 약),

악회(惡灰:부상 부위를 치료하는 약), 자연동(自然銅:뼈가 부러졌을 때 가루를 물에 타 복용하는 약),

연화(鉛華:화상이나 총상을 치료하는 약) 등을 소지하고 다니며 치료해 주었다.

심약은 구한말에 조호장(調護長)으로 계승되는데 군대와 육군 위생원에 소속되어 군인들의 질병 치료를 담당했다.

조선시대에 의원은 중인이었다.

여자 의사인 다모나 수의사인 마의일 경우에는 천대받는 계층들이었다.

어의(御醫)를 하다가 공적이 뛰어나면 <동의보감>을 지은 허준처럼 정3품 이상의 벼슬을 받기도 했지만

아주 드문 일이었다.

허준 이외의 다른 의원들은 정3품이 되더라도 문관의 반대로 직책이 없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힘이 없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어떨까?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의사가 되기 위해 의과대학에 진학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경제적․사회적으로 상류층을 형성하고 있다.

조선시대처럼 천대되는 현상이나 오늘날처럼 공부 잘하는 학생이 편중된 직업을 갖는 것은

사회구조상 바람직하지는 않다요.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직업으로 진출하여 자신의 꿈과 개성을 살리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