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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이 일기를 쓴 이유는 돈 때문이다?

윤의사 2013. 1. 26. 19:02

조선 제17대 효종 4년(1653) 1월에 네덜란드배 스페르베르 호가 네덜란드를 출발하여, 같은 해 6월 바타비아, 7월 타이완에 이르고, 거기서 다시 일본의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중 폭풍우에 밀려 8월 15일 제주도 부근에서 난파당했다. 선원 64명 중 28명은 익사하고, 하멜 이하 36명이 제주도에 표착하여 관원에게 체포되었는데, 하멜을 제외한 35명은 전혀 배우지 못한 하류층 선원이었다.

조선 정부는 이들보다 앞서 표류하여 조선에 거주하고 있던 벨테브레(한국명:박연)를 제주도로 내려보냈다. 하지만 20여 년이 지난 벨테브레는 모국어인 네덜란드어에 익숙하지 않아 어려움을 보였다.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모국어를 깨우친 벨테브레에 의해 하멜 일행은 한양으로 올라와 훈련도감의 포수로 임명되었다. 이들에겐 한 달에 포목 2필의 봉급이 지급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포목을 지급하는 것을 스스로 옷을 만들어 입으라는 뜻으로 알았다. 그리하여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워 배에 있던 사슴 가죽을 환급

받아 이것으로 오두막과 의복 등을 마련했다고 한다. 조선 정부는 하멜 일행이 남쪽에서 왔다고 하여 ‘남해안’ 등 ‘남씨’라는 성을 내렸다.

현종 6년(1665)에 청나라 사신이 오자 하멜 일행 중 2명이 행렬에 뛰어들어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구원을 호소했다. 청나라에서는 자국이 아닌 서양 국가와 조선이 교섭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청나라의 눈치를 보고 사는 조선이기에 이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하멜 일행은 전라남도 강진으로 귀양을 갔다. 지방에서의 생활은 더욱 어려웠다. 때로는 군사 훈련을 받기도 하고, 풀뽑기 같은 막일을 하며 지냈고, 흉년에는 구걸을 하거나 승려들의 도움을 받아 살기도 했다.그 뒤 일행이 나뉘어 조선 전국을 유랑했다.

조선 사람들에게 벽안(碧顔)의 서양 사람들은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조소와 감시 속에서 고향이 그리워 미칠 지경이었던 하멜은 마침내 결단을 내려 생사를 건 탈출을 시도하게 되었다. 현종 7년(1666) 9월 5일 하멜 이하 8인은 우여곡절 끝에 엄중한 감시를 뚫고 가까스로 작은 배를 이용하여 조선을 탈출했다. 그리고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고국 사람들과 재회의 기쁨을 맛보니 13년 28일이라는 세월이 지난 후였다. 하멜은 우리나라에 있는 13년 28일 동안 일기를 썼다. 이 일기를 바탕으로 하멜은 귀국 후 『하멜 표류기』를 저술하여 그 동안의 사정을 기록한 기행문을 남겼다.

『하멜표류기』는 우리나라의 지리, 풍토, 산물, 경치, 군사, 법속(法俗), 교육, 무역 등에 관하여 실제로 저자가 보고들은 바를 기록한 것으로 당시 조선의 사정을 적은 귀중한 자료로서, 한국을 서방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이다.

그런데 하멜이 일기를 쓴 것은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바로 하멜은 귀국하자마자 일기를 바탕으로 13년치 봉급을 청구한 것이다. 하지만 하멜의 회사에서는 거부하였다.

『하멜표류기』를 바탕으로 네덜란드에선 조선과의 무역을 시도했으나 청과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