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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꿈을 펼치지 못한 이옥봉

윤의사 2012. 6. 10. 13:13

오늘 문화방송의 한 프로그램에서 이옥봉에 대해 소개하였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더 소개하고자 한다.

 

이옥봉은 조선 명종 때 충청도에서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 후예 이봉지의 서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며, 본명은 숙원이고, 옥봉은 그녀의 호이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글과 시를 배웠는데, 그녀가 지은 작품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놀랐다고 한다.

결혼할 나이가 되어 자신이 서녀로 첩살이 밖에 할 수 없음을 알고, 아버지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한양의 선비와 어울렸다. 선비 중 조원이라는 사람과 사랑을 나누었다.

조원은 이옥봉에게 “자신의 첩밖에 안되는데 괜찮겠느냐? 또한 자신과 함께 살면 평생 글을 써서는 안되느니라. 네가 글을 쓰는 것은 나의 체면을 깎아내리는 것이니라.”하니, 옥봉은 자신이 글을 쓴 까닭은 외로움과 허망 때문이므로 지아비를 섬기게 되었으니 글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면서 조원의 첩살이를 하였다.

 

조원과의 생활이 20년에 접어들 무렵, 조원 집안의 산지기 아내가 찾아와 하소연했다.

“남편이 소도둑 누명을 쓰고 잡혀갔으니, 억울함을 풀어줄 글을 서주세요.”

옥봉이 산지기 부인의 사정을 들어보니 향리들의 수탈이 분명했다.

옥봉은 파주목사에게 시 한 수를 써보냈다.

 

洗面盆爲鏡 세숫대야로 거울을 삼고

梳頭水作油 참빗에 바를 물로 기름삼아 쓰옵니다.

妾身非織女 첩의 신세가 직녀가 아니온데

郎豈是牽牛 어지 낭군께서 견우가 되리까?

 

너무나 가난한 삶이지만 견우가 아닌 남편이 어찌 소를 훔치겠느냐고 파주목사에게 항의하는 시였다.

이를 본 파주목사는 감탄하면서 산지기를 풀어주었다.

 

그러나 이 일로 옥봉은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조원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여자와는 살 수 없다”며 내친 것이다.

옥봉은 뚝섬 근처에 집을 얻어 살면서 조원과 다시 합치기를 희망했지만 꿈이었다.

 

近來安否問如何 임이여, 요즈음 안부는 어떠신지요?

月到紗窓妾恨多 달빛이 창에 비치니 님생각 한이 많아

若使夢魂行有跡 만약 꿈길이 자추;l가 있게 한다면

門前石路半成沙 임의 문앞 돌길이 반은 모래가 되었으리요.

 

‘몽혼’ 시이다. 조원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을 함께 담고 있다.

 

조선 인조 때 승지 조희일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곳 원로대신이 “조원을 아느냐”고 물으니,

조희일이 부친이라 대답였다.

이에 원로대신은 서가에서 <이옥봉 시집>이라 쓰인 책 한 권을 꺼내 보였다.

조희일은 깜짝 놀랐다.

이옥봉은 아버지 조원의 소실로 생사를 모른 지 40여 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옥봉이 명나라의 사신들을 맞아 시로 문답을 하던 것이 너무나 빼어난 작품이라

시집으로 엮어놓은 것이라 한다.

 

하지만 옥봉은 조원에 대한 원망을 안고 자신이 쓴 시로 온 몸을 감고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고도 하며,

혹은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죽었다고도 한다.

 

시대를 잘못 만나 자신의 꿈과 이상을 펼치지 못한 옥봉,

비록 그녀는 떠났지만 그녀의 많은 작품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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