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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애국가는?

윤의사 2012. 6. 17. 08:16

한 정신나간 국회의원이 “애국가는 국가는 아니다. 군사 정권 때 만들어졌다.”라고 주장하여 파문이 일고 있다. 국회의원의 자격도 없는 자이니 이런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말을 했을 것이다. 일일이 대응할 가치조차 없지만 애국가의 변천은 이렇다.

 

의식이나 행사가 있을 때, 또는 방송의 개시와 종료에 꼭 우리가 부르고 듣는 것이 애국가이다.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1절에서 4절까지 이루어진 우리의 국가, 그러나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것이 세 번째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공식적인 국가가 아닌 나라 사랑의 정신을 일깨우는 노래로서의 애국가는 갑오개혁(1894) 이후로 상당히 많았다. 그 중에서 스코틀랜드의 민요 ‘올드 랭 사인’ 곡조에 붙여 부르던 ‘애국가’ 가사에 안익태가 곡을 붙인 ‘애국가’가 공식 국가로 채택되어 지금에 이른다.

 

1896년에 학부주사 이필균의 ‘애국가’, 인천 제물포 전경퇴의 ‘애국가’, 한명원의 ‘애국가’, 새문안교회 신도들이 지은 ‘애국가’, 정동 배재학당 문경호의 ‘애국가’ 등이 있다. 대부분 1900년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곡조를 알 수 없으며, 새문안교회의 ‘애국가’와 배재학당 학생들이 부른 ‘애국가’만 그 곡조가 전한다. 1896년 독립문 정초식(定礎式) 때 “성자신손(聖子神孫) 오백 년은 우리 황실이요……”의 가사로 된 애국가를 배제학당 학생들이 불렀다는데, ‘올드 랭 사인’에 가사를 붙여서 불렀다고 한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의 후렴구는 이 때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 뒤 광무 개혁을 진행하던 대한제국 정부가 국가(國歌)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1902년 8월 15일 제정, 공포한 ‘대한제국애국가’가 최초의 공식적인 국가이다. ‘상뎨(上帝)는 우리 황데(黃帝)를 도우사……’로 시작되는 이 애국가는 당시 군악 지휘자 에케르트가 작곡한 것이다. ‘대한제국애국가’는 1904년 5월 각 학교에 배포되었다. 황실에 대한 충성이 주제인 이 애국가는 일본이 우리나라의 주권을 빼앗은 1910년에 없어지게 되었다.

 

3․1운동 이후에는 ‘올드 랭 사인’ 곡에다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붙인 애국가가 많이 불렸다. 이 곡은 우리 나라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여러 공식 행사에 빠짐없이 불려지게 되었으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안익태가 지은 ‘애국가’가 공식적인 국가로 채택되면서 없어지게 되었다.

 

안익태가 ‘올드 랭 사인’의 곡조에 부쳐 노래한 애국가를 처음 접한 것은 3․1운동 때였는데, 그는 가슴이 찡하도록 감명을 받은 한편 우리의 곡이 아닌 외국곡에 맞춰 애국가를 부르는 것에 크게 상심하게 된다. 그리하여 1930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후에 음악 수업을 하는 틈틈이 40여 개 나라의 국가를 수집하면서 악상을 다듬어 1935년경 지금의 애국가를 완성했던 것이다. 안익태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한 한국 선수단을 찾아가 이 곡을 함께 불렀으며, 상해 임시정부와 미국, 일본 등지의 교포들에게 악보를 보내어 그들에 의해서 서서히 불려지기 시작했다.

 

1948년 정식으로 정부가 출범하면서 국가로 불리기 시작한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는 지금도 우리들 가슴속에 나라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훌륭한 곡이다. 모두 4절의 가사로 된 16마디의 4분의 4 박자의 곡이다. 작사자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아 윤치호, 안창호, 민영환 등이 지었다는 설이 있다. 최근에는 윤치호가 작곡했다는 설이 더 신빙성이 높다고 알려져 있다.

 

2010년 행정안전부는 국민의례규정에서 국가로 법적 근거를 인정받았다. 현재의 애국가는 일본의 식민지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우리 민족과 함께 하였으니 다른 나라의 국가와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