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문화사전/우리역사문화사전

옛날에도 댓글문화가 있었다면서요?

윤의사 2012. 3. 22. 09:17

조선시대는 임금의 권한을 견제하기 위한 여러 기관들이 있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삼사(三司)이다.

삼사는 임금의 잘못을 지적하여 바로 잡는 사간원(司諫院),

임금의 물음에 응하며 경연을 하는 홍문관(弘文館),

관리들의 잘잘못을 지적하는 사헌부(司憲府)이다.


삼사의 활동을 흔히 언론이라 한다.

그러므로 조선시대만큼 언론이 왕성했던 역사는 그리 흔하지 않다.

조선의 언론은 왕권을 견제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우리 조상들은 언론이라는 말 대신에 ‘간(諫)’이라는 용어를 삼국시대부터 사용해 왔다. 간쟁(諫諍)으로도 불린 ‘간’은 윗사람이나 임금께 옳지 못하거나 잘못한 일을 고치도록 말하는 뜻이다.


간쟁은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전례나 고사를 들어 정중한 형식을 갖춰 간하는 규간(規諫)부터 단도직입적으로 하는 직간(直諫), 돌려서 말하는 휼간(譎諫), 죽음으로 간하는 시간(屍諫) 등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간쟁의 유형 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역시 규간이다.


조선시대에 민심을 전하는 방법으로 상소나 차자, 장계, 신문고, 격쟁, 방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이것을 받은 임금은 가벼이 여기지 않고 답을 하거나 공론으로 생각하여 정책에 반영하였다.


임금이나 관리들이 답을 해주는 것은 오늘날 인터넷에서 올라오는 글에 대한 ‘댓글’이라고 할 수 있다.


댓글의 또다른 형태는 익명성 확보를 위해 사발을 엎어 놓고 글을 쓴 사발통문도 있다.

사발통문은 자신들의 뜻을 나라에 전하거나 반란을 꾀할 때,

주모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둥글게 사발 모양의 원을 중심으로 서명을 했기에 나온 이름이다.


우리 조상들이 댓글로 많이 사용한 것은 낙서(落書)이다.

일본 에도(江戶)시대에 힘없는 백성들의 항거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불만을 적은 쪽지를 길거리에 슬쩍 떨어드려 놓은 것을 ‘오토미 부시(落文)’라고 한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에도 낙서가 백성들의 불평불만을 해소하는 방편으로 쓰였는데,

돌이나 바위에 당시의 사회상이 새겨지기도 했다.

그러면 그곳을 지나다니는 보부상들이 그런 돌을 사람이 잘 다니는 산길에다 슬쩍 놓아두었고,

다른 보부상들은 그 내용을 읽고 다른 마을에 전파하거나

자기가 알고 있는 새로운 사실을 덧붙여 새겨넣기도 했다고 한다.

이를 글돌(書石)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그대로 놓여지는 것은 읽고서 제자리에 엎어놓지 않으면

횡사(橫死)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댓글 문화의 전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