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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대보름, 통행금지가 해제되었다.

윤의사 2012. 2. 3. 13:05

다가올 6일은 정월 대보름이다.

이날은 조선시대에서 통행 금지를 해제하였다.

통행 금지, 오랜만에 들어보는 소리이다.

 

1982년 1월 6일부터 우리나라에서 통행 금지가 해제되었다.

통행 금지는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4시간 동안 통행을 금지시켜

간첩 등의 활동을 막으면서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되었다.

그래서 1982년 1월 6일 이전까지는 자정이 넘었는데도 통행하는 사람이 있으면 경찰은 통행인을 경찰서나 파출소로 연행하여 신분이 확인되면 새벽 4시가 되어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했으며, 이런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면 여인숙이나 여관을 찾아드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는 경찰과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전개해 나가다 불상사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통행 금지를 옛날에는 인정(人定:인경이라고도 함)이라고 하였다. 이 제도는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에는 시행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에는 《고려사》권7에 ‘충혜왕 3년(1332) 정월부터 종두의 종을 쳐도 울지 않는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와 같은 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그 내용은 확실하지 않다.

 

그러므로 인정 제도는 조선시대에 그 제도적 장치가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1398년에 한성에 종을 걸게 되었을 때 개국공신 권근(權近)이 종명(鐘銘) 서문에서 ‘① 새 왕조의 개국이라는 큰 공업(工業)을 후세에 전하고,

② 아름다운 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후세 사람들의 이목을 깨우치게 하며,

③ 넓은 도시와 큰 고을에서 새벽과 저녁에 종을 쳐서 쉬는 시각을 엄하게 하니 종의 용도가 다양하다’라고 하였다.

 

종루는 서울의 한복판이 되는 현재의 종로와 남대문로가 교차하는 네거리에 설치하고, 큰 종을 달아 인정과 파루를 알렸고, 그 밖에도 도성 안에 큰 화재가 났을 때도 종을 쳐서 모든 사람들에게 알렸다.

인정은 매일 밤 10시에 종을 28번 치던 일을 가리키는 말로서, 이에 따라 성문을 닫고 통행 금지를 알렸으며, 매일 새벽 4시에 종을 33번 쳐서 통행 금지 해제를 알리는 신호를 파루(罷淚)라고 했다. 인정 때 28번, 파루 때 33번 종을 울리는 것은 불교의 교리와 관계 있는데,

인정은 우주의 일월성신(日月星辰) 28수(宿)에 고하기 위하여 28번을 치는 것이고,

파루는 제석천(齊釋天)이 이끄는 하늘의 33천(天)에 고하여 그 날의 국태민안을 기원한 것이다.

인정의 목적은 범죄와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치안 유지이므로 인정 이후에 통행하다가 적발되면 경수소(警守所)에 구금하고, 이튿날 곤장을 때렸는데 형벌량은 10도(度)에서 30도까지 어긴 시각에 따라 달랐다.

그런데 새해 정월 대보름날이 되면 서울 사람들은 종로 거리로 나와 종소리를 듣고 헤어져 여러 다리(橋)를 밟는다. 이렇게 하면 다리(脚)에 병이 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대광통교, 소광통교, 수표교에 가장 많이 사람들이 모였다. 이 날 저녁은 전례에 따라 통행 금지를 없앴다.

모처럼 집안에서 벗어난 여성들은 답교 놀이를 통해 거리로 나와서, 규방(閨房)에 갇혀 살던 답답함을 마음껏 풀어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따라 그 폐단도 많이 나타나, 처음에는 허용되었던 답교 놀이도 나라의 제재를 받기도 하였다.

 

정월 대보름날에는 평소에는 서울의 북문이라고 할 수 있는 숙정문(肅靖門)이 닫혀 있었으나, 이 날만큼은 문을 열고 부녀자들을 맞이했다. 이 부근의 계곡이 무척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보름날 전에 세 차례 이상 오면 화를 예방한다는 풍습 때문이다. 이를 삼유북문(三遊北門)이라고 한다.

 

 

서울의 북대문인 숙정문, 정월대보름에 부녀자들이 출입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