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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레스 오블리주, 여수 봉소당

윤의사 2012. 1. 31. 16:41

전남 여수 봉강동에 가면 언덕 위에 커다란 한옥 저택이 자리 잡고 있다.

집의 당호는 봉소당(鳳巢堂)이다.

'봉황의 집'이라는 뜻이다.

웬만한 큰 집은 나라가 큰 변란을 당할 때 훼손되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봉소당은 지금까지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더구나 여수는 1948년에 여수․순천 반란 사건이 일어난 큰 혼란 지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소당이 유지된 것은

그 지역에서 주인이 얼마나 많이 베풀었는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현재 봉소당의 주인은 한영대학을 운영하는 김재호씨이다.

아직도 부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영광 김씨인 김재호씨가 부자가 된 것은

증조부 때인 김한영씨가 구한말에 큰 장사로 많은 돈을 벌어 만석군(1만2천석)이 되면서였다.

만석군이 된 김한영은 오고 가는 과객들을 후히 대접하였다.

그는 과객들이 집에 머물면 잘하는 일을 물었다.

과객이 잘하는 일을 찾아 그들이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부자들이 겪는 문제 중에 소작인과 소작료를 가지고 대립하는 것이었다.

김한영은 어려운 소작인이 소작료를 낼 수 없는 경우에는 소작인 집안 식구들에게 일거리를 주고, 그 일을 모두 마쳤을 때에는 소작료를 면제해주었다. 이것은 처지가 어려운 소작인만을 봐주면

다른 소작인들이 불만을 가지는 것을 없애기 위한 김한영만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김한영 집안의 베풂은 어려운 시절에 효과가 나타났다.

1948년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자,

좌익들은 봉소당 주인인 김성환(1915~1975)을 잡아갔다.

순천 지역의 좌익 책임자는 평소에 봉소당의 혜택을 입었던 소작인의 아들이었다.

그는 봉소당 주인을 죽일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을 호위하던 병사들을 나가게 한 뒤,

의자를 뒤로 한 채 신문만 보고 아무 말이 없었다.

30분이 지나도록 아무 말이 없자,

그제서야 김성환은 책임자의 뜻을 알아챌 수가 있었다.

그는 대놓고 김성환에게 도망가라고 할 수가 없으니,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던 것이다.

김성환은 창문을 열고 홈통을 타고 1층으로 내려온 다음,

야산으로 도망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평소에 남에게 많이 베풀었던 것이 덕이 되어 돌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큰 난리가 일어났을 때 큰 피해를 보는 것이 그 고장에서 제일 가는 부잣집인데도

봉소당이 유지되었던 까닭은 바로 ‘베풂’이었던 것이다.

여수 봉소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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