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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절미'를 인조가 지었다?

윤의사 2012. 1. 4. 14:33

여러 가지 떡을 만든 우리나라에서 36가지 이상 떡이 있었다.

이것은 명문가에 시집가려면 180가지의 음식을 만들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중에서 36가지의 떡을 만드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떡은 한국인에게 한 마음이라는 의식을 심어주기도 하였다.

인절미(引切米)가 있다.

이 말은 연변지방에 가면

손님 밥상 복판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떡 한무럭이 올라 오는데,

주인과 손님이 각각 손으로 떼어 먹음으로서

식사가 시작된 것에서 나온 말이다.

떡에는 찰기가 있어 서로를 붙게 하고 있으며,

떡을 함께 먹음으로써 나눔을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제사 때 반드시 떡이 오르게 된 것은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조상신이나

신령과 가까이 하기 위함이요, 한 동네 사람들이 떡을 나누어 먹는 것은

한 마음을 다지기 위함이었다.

인절미의 유래에 대한 다른 설도 있다.

인조 2년(1624)에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었다.

이괄을 무서워 하던 서인들은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무고를 하였다.

이에 이괄은 반란을 도모하였다.

이괄이 한양까지 함락시킬 정도로 기세좋게 나가자,

인조는 겁을 먹고 수원과 천안을 거쳐 공주에 머물렀다.

공주에 머무르고 있을 때

저녁에 농민이 떡을 해서 가지고 왔다.

인조는 배고푸던 차에

아주 맛있게 먹었다.

인조는 말했다.

“아~ 절미(絶味)로다! 절미야!”

떡을 먹고 난 인조가 물었다.

“이 떡 이름이 무엇인가?”

이에 농민은 당황하였다.

떡을 부르는 이름이 딱히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르옵니다. 그냥 떡이라 부르옵니다.”

인조가 물었다.

“그대 성이 무엇인가?”

“인가이옵니다.”

“그래? 인가라.....

그럼 앞으로 이 떡을 '인절미'라고 하거라.“

그래서 인절미가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