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이 우리나라 문헌에 나타나는 것은 연맹 왕국시대이다. 5부족 연맹체였던 부여는 각기 동물을 부족의 토템으로 숭배하였는데, 그 중에 양을 숭배하였으며, 이것이 기원이 되어 윷놀이가 생겨났다.
신라에 들어와 경주에 있는 김유신묘나 괘릉에서 양을 조각하거나 호석(護石)으로 만들었으나, 그림으로는 드문 편이다. 공민왕의 ‘2양(二羊)’과 작자 미상의 ‘산양(山羊)’이 전해진다.
양에 대한 기록은 <일본서기>에 ‘법왕 1년(599) 7월에 백제에서 일본으로 낙타 한 마리, 나귀 한 마리와 함께 양을 두 마리 보냈다’고 나와 있다.
이 때 전해진 양들은 아마도 제사용으로 많이 쓰이거나 식용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옷감으로 쓸 수 있는 면양은 고려시대 금나라에서 전래되었다. <문헌비고>에 의하면 ‘의종 23년(1169)에 금나라에서 양을 2000마리 보냈는데, 그 중에 한 마리가 뿔이 네 개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양요리가 발달한 것은 몽골의 침입을 받으면서부터이다. 몽골에서는 양고기를 으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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