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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윤의사 2010. 6. 23. 14:17

이제 6.25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조국을 위해 산화하신 영령과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을 건 전투를 한 국제연합군이 없었다면 지금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입니다.

저 김정일 일가만을 위한 북조선인민공화국의 국민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민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다시금 6.25를 생각하고 영령들의 극락왕생을 빌면서 6.25에 대한 생각을 적어봅니다.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하여 3년 1개월 2일 동안 전개된 전쟁이었다. 사회주의의 맹주였던 소련의 팽창주의와 중국의 공산화로 외세의 힘을 빌어 통일이라는 명분아래에서 김일성이 도발한 것이다.

  6.25 전쟁이라는 용어에 대하여 ‘한국전쟁’, ‘조국해방전쟁’(북한), ‘조선전쟁’(일본), ‘항미원조전쟁(중국)’으로 불리우지만, ‘6.25 사변’이라고 불리워져야 한다. 왜냐하면 ‘사변(事變)’의 사전적 뜻이 ‘선전 포고 없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나와 있기 때문이다. 곧 6.25 전쟁은 북한 김일성이 사전 선전포고 없이 대한민국을 침공한 전쟁이다.

  북한의 갑작스런 침략에 대한민국은 후퇴를 하였으며,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당했다. 이때 이승만 정권은 국민들을 기만하여 많은 인명 피해를 보았다.

  전쟁 발발 12일만인 1950년 7월 7일에 국제연합은 북한을 침략국으로 규정하여 대한민국을 군사적으로 원조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에서 40만 명의 국제연합군이 한국전에 참전하였다.

  1950년 7월 25일에 국제연합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설정한 후에 반격을 시도하였다. 이에 따라 8월 15일에 부산까지 차지하겠다는 소련과 김일성의 희망은 사라지게 되었다.

  국제연합군 사령관인 맥아더의 지휘 아래 국제연합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전개하여 9월 28일에 서울을 수복하였으며, 10월 1일에 38도선을 통과하여 북으로 진격하여 압록강에 이르렀다. 그러나 10월 25일에 압록강에 도착한 중국군의 인해전술로 전쟁은 치열해졌으며, 국제연합군은 1951년 1월 4일에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1953년 7월 27일에 휴전이 체결되기까지 전쟁은 38도선 부근에서 치열한 소모전으로 전개되었다.

  6.25 전쟁으로 141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 374,000 명이 희생되는 피해를 보았다.

  전쟁에 의한 통일은 이미 낡은 방식의 통일이다. 평화적 통일을 위한 남북한의 상호협력이 요구되며, 이를 위해서는 남북한의 신뢰회복이 가장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