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국립중앙박물관 신라실에서는 '6세기 신라를 보는 열쇠 문자전'이 열리고 있다.
전시된 유물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임신서기석'이다.
1934년 5월 4일 경주시 견곡면 금장리에서 발견된 임신서기석은 길이 34센티미터, 윗너비 11센티미터이다.
이 돌을 발견한 사람은 당시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 관장이었던 오사카 긴타로이며
그는 이 돌을 박물관에 가져다 두었는데, 뒤에 역사학자 스에마쓰 야스카즈가
1935년 12월 18일에 경주 분관에 내려와 돌에 새겨진 문장을 판독하고 이 돌에 '壬申誓記石'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두께는 얇은 편으로 1센티미터 크기의 문자가 5행으로 74자가 쓰여 있다.(보물1411호이다)
두 화랑이 맹세하는 내용으로 보아 신라통일 이전의 비석으로 보여지고 있다.
임신년 6월 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쓴다
하늘 앞에 맹세하여 지금으로부터 3년 이후에 충도를 지키고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일 이 일을 어기면 하늘로부터 큰 죄를 얻을 것을 맹세한다.
만일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우면 가히 행할 것을 맹세한다.
또한 앞서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세하였다.
곧 <시경>, <서경>, <예기>, <춘추>를 3년 동안 습득하기로 맹세하였다.
壬申年六月十六日 二人幷誓記/
天前誓 今自三年以後 忠道執持 過失无誓/
若此事失 天大罪得誓/
若國不安大亂世 可容行誓之/
又別先辛未年七月二十二日大誓/ 詩尙書禮傳倫得誓三年
많지 않은 내용에 7번의 맹세가 쓰였다.신라 사람들이 맹세를 많이 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맹세는 화랑도의 계율인 '세속오계'에도 보인다. 맹세는 곧 믿음을 뜻한다. 서로 믿고자 맹세를 하였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믿을 수 없는 사회로 바뀌고 있다. 신라인들의 맹세를 빌려서라도 서로를 믿을 수 있는 사회로 바꾸어야 하겠다.(사진:경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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