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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윤의사 2009. 10. 8. 07:50

명성황후는 조선 26대 임금인 고종의 비이다.

명성황후라는 묘호는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하면서 붙여졌다.

일본의 책략에 의하여 그동안 명성황후는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암닭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라는 소리를 일본인들이 퍼뜨리면서 명성황후를 비하시킨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저지른 만행때문인 것이다.

그들은 청일전쟁 후 조선을 자신들의 속국으로 삼았다고 생각을 하였다.

미국과 영국 등 강대국의 지지를 얻어 조선을 지배하려 하였다.

이를 위하여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자 내무대신출신인 이노우에가 조선공사로 임명되었다.

사실상 좌천이었지만 조선을 지배하겠다는 일념으로 이노우에는 흔쾌히 이를 수락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노우에의 뜻은 러시아를 비롯한 독일, 프랑스의 삼국간섭으로 허무하게 무너지게 되었다.

삼국간섭으로 러시아의 힘을 확인한 명성황후는 일본의 침략을 러시아를 이용하여 하였다.

당장 일본과 싸울 힘이 없었던 조선이기에 강대국의 힘을 빌려 일본을 막고자 했던 것이다.

이를 눈치챈 일본은 극우파인 미우라를 주한 공사로 임명하였다.

미우라는  우익 낭인들을 동원해 10월 8일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제거한다'는 정책의 중심 인물인 명성황후를 건천궁에서 시해하고 시신을 불에 태워 증거를 인멸하였다. 이를 '을미사변'이라고 한다.

을미사변은 일본이 국가적으로 우리 황후를 시해한 사건이다. 그 증거로  같은 달 14일 이토 히로부미 총리대신에게 보낸 미우라의 보고서에 나타나 있다. 

“우리 세력을 유지하고 당초의 목적(조선 보호국화)을 달성하기 위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일본이 대답할 차례이다.

오늘은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114년이 되는 날이다. 국가적인 범죄 행위에 대해서 아직까지 일본은 한 마디 사과가 없다.

황태자가 암살되어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전쟁이 제1차대전으로 확전된 것이다.

당시에 국력이 약했던 조선이었기에 전쟁 상황으로 발전되지 않았다. 힘이 필요함을 느껴야만 하겠다.

이제 동양 평화를 위해서 일본은 지난 일을 깔끔하게 처리했으면 한다.

독일을 봐라. 독일은 2차 대전이 끝나고 자신들이 유대인들에게 저지른 일에 대해서 보상을 끝마쳤다. 하지만 지금도 자신들에 의해 피해를 본 유대인이 나타나면 즉각 보상과 사과를 하고 있다.

일본도 독일과 같이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보상을 해야 앞으로 동양 평화를 이루어질 것이며, 유럽과 북미에서 블록화되어가는 국제 사회의 경쟁에서 동아시아가 앞서갈 수 있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