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운 선생님/이재운선생의 우리말 이야기

22. 우리말의 보물창고

윤의사 2009. 6. 1. 18:22

22. 우리말의 보물창고

 

<훈몽자회>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 세조 때 중인가문에서 태어나 중종 때 정2품관에 이른 고위 외교 관리 최세진이 어린이 학습서를 펴냈다. 고려시대부터 아이들이라면 천자문부터 배우는 게 만고불변의 상식이었지만, 사실 천자문은 대과를 마친 이도 잘 모르는 고사(故事)투성이의 난해한 책이다. 이런 걸 갓 젖을 뗀 어린이들에게 가르쳐 봐야 큰 도움이 되질 않는다. 조선시대의 아동 교육이라는 게 중국 고전이나 달달 외는 앵무새를 만들어낼 뿐이었다. 그런 중에 중국어에 능통해 외교 문서는 거의 도맡아 처리한 최세진이 실용 학습서를 썼으니 지금 생각해도 매우 특별하고 고마운 일이다. 전문 통역사답게 그는 실용 언어에 관심이 많았다. 언어학에 조예가 있던 그가 지은 <훈몽자회>는 어린이 학습 말고도 한글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우리말을 잘해야 외국어를 잘한다는 말이 이때 이미 실천된 것이다. <훈몽자회> 서문을 보면 최세진의 지극한 마음을 엿볼 수가 있다. “무릇 시골이나 지방 사람들 가운데 한글을 모르는 이가 많다. 이제 한글 자모를 함께 적었으니 먼저 한글을 배운 다음 훈몽자회를 공부하면 밝게 깨치는 데 이로움이 있을 것이다. 한자를 모르는 사람도 역시 한글을 배우고 나서 한자를 배우면, 비록 스승이 가르쳐주지 않더라도 한문에 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우리말 우리글을 먼저 배우고 그다음에 한문을 배우라고 권하고 있다. 그래서 <훈몽자회>에는 한글만 알면 혼자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한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시옷’의 옷을 적을 때는 실제로 옷을 가리키는 衣(발음은 의지만 뜻은 옷)라고 한다든지, ‘ㅋ’을 표시할 때는 키를 가리키는 箕(발음은 기지만 뜻은 키)라고 하는 것이 그런 흔적이다. 갇(갓)을 笠으로 적고, 갈(칼)을 刀로 적고, 갓(가죽)을 皮로 적는 노력은 한글을 가르치려는 지극한 노력으로 보인다. 이때 최세진이 시도한 것처럼 한자를 순우리말로 읽었더라면 우리나라의 지식문화 축적에 더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어린이용으로 고른 한자는 모두 3660자다. 실제 생활에 쓰이는 어휘를 주로 고른 것이므로 대개는 순우리말로 표현되는 한자들이다. 게다가 그는 뜻이 비슷한 한자를 구분하는 법까지 친절하게 설명했다. 우주(宇宙)의 ‘우’는 공간이요, ‘주’는 시간이라는 설명이 이 책에 나온다. 성신(星辰)이 별과 별무리를 가리킨다는 등 매우 구체적인 쓰임새가 적혀 있다. 최세진의 공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3660자에 이르는 생활 한자에 해당하는 순우리말을 꼼꼼히 적어놓았다는 것이다. 훈몽자회는 순우리말을 쉬운 한자로 풀이해준 최초의 <우리말 사전> 구실을 하고 있다. 여기 나오는 3660자만 알아도 조선시대 교양인으로 살아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지난번에 소개한 <계림유사>도 귀한 책이긴 하지만 어휘량이 너무 적어 서운했는데, <훈몽자회>는 500여년 전의 우리말을 풍부하게 실어놓았다. 어떤 말이 있었는지 보자. 당시 문화와 문명은 이 3660자 속에 다 들어 있었다. 고기잡다(漁), 눈망울(眸), 따오기(鶩), 머금다(呑), 모시(苧), 무지개(霓), 벌레먹다(蝕), 보조개(頰), 썩다(腐), 열흘(旬), 우듬(幹), 우레(雷), 자개(貝), 초하루(朔), 파(蔥), 흙(泥) 훈몽자회를 읽다 보면 최세진은 세종이 발명한 한글을 일반 백성들에게 보급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조선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재운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어원 500가지> 대표 저자·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