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운 선생님/이재운선생의 우리말 이야기

25. 일제 강점기, 한자의 탈을 쓰고 몰려든 일본어

윤의사 2009. 6. 16. 14:18

25. 일제 강점기, 한자의 탈을 쓰고 몰려든 일본어

한자가 들어오면서 없어진 순우리말이 많다. 하지만 경쟁력 있는 어휘들은 한자에 시달리며, 언어와 문자에 관련된 크고 작은 사건들을 견디며 굳세게 살아남았다. 하지만 조선 후기와 일제 강점기에 거의 무방비로 들어온 일본식 한자어는 아직도 큰 문제다. 한자어는 한자만 알면 우리말로 쉽게 바꿀 수 있지만, 일본 사정에 맞게 고쳐진 일본식 한자어는 갑작스럽고 낯설어 무슨 뜻인지 알아내기 쉽지 않다. 그냥 무늬가 한자니 한자인가 보다 하지 그게 정작 일본식 한자어라는 걸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다만, 이제 와서 이건 일본식 한자어고 저건 중국식 한자어라고 가려쓸 여유는 없다. 한자어 자체를 줄여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한자어를 들여갈 때 일본 고유의 글자인 가나를 함께 표기하도록 해서 오늘날에도 한자어에는 가나 표기가 따라붙는다. 이 점에서는 우리보다 효율적이었다. 우리는 가나보다 훨씬 표기력이 좋은 한글이 있었음에도 수백년간 한자어를 한글로 표기하지 못한 채 한자는 한자로 읽었다. 그러면서 작은 중국(소중화·小中華)이라는 엉뚱한 자부심을 지녔다.(외래어를 알파벳 등 그 나라 문자로만 표기하려는 것과 같은) 그러는 사이 일본은 한자어를 들여가 빈약한 가나와 결합해 문자 생활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일본은 가나와 한자어를 섞어쓰면서 중국뿐 아니라 영국·프랑스·미국·네덜란드 등의 선진 문명을 급속히 받아들였다. 일본의 일반 백성들도 이런 섞어쓰기 덕분에 문자 생활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우리는 오로지 한자어만으로 적다 보니 생활 문자로 자리잡지 못했다. 결국 문명이라고는 중국에서 오는 것 말고는 거의 없어 오랜 세월 모욕을 견뎌야 했다. 문자란 지식과 정보를 담는 도구다. 문명은 이 문자를 통해 이뤄진다. 때문에 문자는 어떤 지식·정보도 담을 수 있을 만큼 흡수력이 좋아야 한다. 그런데 한자는 다른 문자에 비해 흡수력이 떨어져 중국에서조차 옛문자를 ‘고문’(古文)이라고 낙인찍어 폐기처분하고 완전히 새로운 간체자를 쓰고 있으며, 컴퓨터나 휴대전화에서 한자를 검색할 때는 알파벳을 쓴다. 일본어도 알파벳을 이용해 한자어와 가나를 검색한다. 그런데 한글은 흡수성이 워낙 뛰어나 어떤 외국어라도 자연스럽게 쓸 수 있다. 한자든 일본어든 영어든 우리말에서는 큰 어려움 없이 쉽게 소통된다. 이것이 우리나라가 아이티(IT)강국으로 일어선 배경이기도 하다. 이러다 보니 우리말은 어원이 복잡하기는 하나 어휘는 하루가 다르게 풍부해진다. 어휘가 풍부해지면 표현력이 높아지고, 그만큼 정보의 저장·전달 능력이 높아지는 것이다. 다만 일본식 한자어가 너무 많이 섞여 있으면 크고 작은 혼동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 힘들어도 우리말로 고쳐나가야 한다. 너무 많아서 예를 들기도 쉽지 않고, 눈에 비치면 잘 잊혀지지 않아 여기 적지는 않는다. 곱고 바른 우리말을 열심히 쓰다 보면 저절로 해결될 것으로 믿는다. 안 그러면 홍콩에서 활약하는 일본인 배우 ‘金城武’는 ‘가네시로 다케시’가 맞지만, 어떤 이는 그를 ‘금성무’라고 부르고, 어떤 이는 ‘진청우’라고 부르는 일이 생긴다. 이렇게 되면 서로 어떤 소통도 할 수 없게 된다. 언어는 소통을 전제로 만들어진 도구인데 이런 경우에는 도리어 소통을 막는 구실을 한다. 한글을 숯이나 스펀지처럼 흡수력이 강한 문자로 지켜나가자면 찌꺼기나 때는 말끔히 씻어내야 한다. 우리말을 찾아쓰고 골라쓰고 자주 쓰는 게 우리말을 잘 씻는 방법이다.

                                         이재운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어원 500가지> 대표 저자·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