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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부정 선거의 방법

윤의사 2025. 3. 15. 14:41

1960년 3월 15일 자유당 정권은 부통령으로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한 부정선거를 하였다.

조병옥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선거를 한 달가량 앞두고 미국에서 치료를 받던 중, 1960년 2월 15일 갑자기 세상을 떠나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이 단독후보가 되었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에 맞서 민주당이 내세운 신익희가 유세 중 세상을 떠난 것에 이어 민주당은 두번째로 대선후보 없이 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사실 1956년에 대통령 후보 단일화로 신익희와 조봉암이 합의했다가 신익희의 사망으로 조봉암을 민주당에서 지지했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바뀌었을지 모른다. 

문제는 이승만 전대통령의 나이였다. 1875년생인 이 전대통령은 당시 85세였기에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자유당은 부통령을 이기붕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부정선거를 했던 것이다. 자유당은 내무부 관리와 이정재 등 정치깡패를 동원해 부정선거를 획책했다. 대표적인 것으로 개표 도중 전기를 나가게 한 뒤 표 계산에서 부정을 저지르는 '올빼미 개표', 자유당 무더기 표 사이에 야당표나 무효표를 끼워넣는 '샌드위치 표', 개표 종사자가 개표 도중 야당표가 나오면 일부러 인주를 묻혀 무효표로 만드는 '빈대잡기 표', 야당 참관인들에게 야식을 준다며 닭죽에 수면제를 넣어 잠재우는 뒤 조작된 투표용지를 바꿔치기하는 '닭죽 개표' 등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결과 자유당 부통령 후보인 이기붕의 표가 100%에 가까운 결과가 나올 것이 예상되자, 최인규 내무장관은 '대통령은 80%, 부통령은 70-75%선이 나오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결과적으로 이기붕은 79.2%, 장면은 17.5%의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이기붕이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부통령 당선의 기쁨은 잠시, 마산에서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선거 당일 오후 6시부터 시작돼 경찰이 강제 해산할 때인 11시까지 이어졌다. 이때 경찰의 발포로 8명이 사망하고 200여 명이 부상당하는 등 유혈사태를 빚었고, 이날 행방불명됐던 마산상고 신입생인 김주열군이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참혹한 시체로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면서 4.19혁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김주열 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