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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삼절

윤의사 2024. 2. 25. 16:54

흔히 송도삼절이라고 하면 황진이가 말한 자신과 서경덕, 그리고 박연폭포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선조부터 인조 연간에 사람들은 송도삼절을 최립의 문장, 차천로의 시, 한호의 글씨를 일컬었다.

최립()은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집안은 가난하였다.

자는 입지(立之)이며, 호는 간이(簡易)이다. 간이는 간이, 변역, 불역으로 구분하는 <주역>에서 따온 것으로 

'세상만물은 끊임없이 변하지만 간단하고 평이해 쉽게 이해할수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명종 10 년(1555) 17세의 나이로 생원시와 진사시에 나란히 합격하였다.

6년 뒤인 명종 16 년(1561) 문과 시험에 장원 급제한 이후 관직에 나아가 여러 지방의 수령을 지냈다.

뛰어난 문장력 덕분에 조선중기 외교문서를 작성해 선조 10년(1577)과 선조 14(1581) 주청사(使)의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명나라에 가서는 당시 명나라 문단의 대표적 문인인 왕세정을 만나 문장을 논하였는데 그곳 문인들로부터

명문장가로 칭송을 받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문원 제조로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 문서를 여러 차례 작성하였으며,

선조 26 (1593)에는 군량을 요청하기 위한 주청사로 파견되었다.

다음해에는 세자 책봉을 위한 주청 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왜란 후 동지중추부사, 강릉부사, 형조참판 등 여러 벼슬을 거치다 은퇴하였다. 

이산해(李山海), 이순인(李純仁), 송익필(宋翼弼), 최경창(崔慶昌), 윤탁연(尹卓然), 백광훈(白光勳), 하응림(河應臨) 등과

함께 동사팔문장(東史八文章)’으로 불릴 만큼 문장이 뛰어났다.

문집으로 『간이집』 9권이 있고, 행주 전승비 등을 남겼다. 

선조 25년(1592) 최립이 전주부윤으로 있다가 중추부로 불려와 중국과의 외교 문서를 작성할 때였다.

이때  승문원에는 윤두수·이덕형 같은 인물들이 저마다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였기에 외교 문서를 하나 만들 때마다

여러 사람들의 글들을 짜깁기해야만 하였다.

최립은 외교문서를 작성할 때의 고심하던 마음을 풍자한 시를 남겼다.

 

난세에 글을 쓰는 것이 바야흐로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데

남의 구미에 맞춰 글자를 짜깁기하니, 더욱 똥파리가 와글거리는 것 같도다.

亂世用文方釋馬(난세용문방석마)

從人安字轉成蠅(종인안자전성승)

 

아마도 외교문서를 작성하는데 고민이 컸던 것 같다. 

요즘에 국회의원 선거가 가까워오자 똥파리들이 극성을 부린다.

각 정당에서는 오직 대한민국과 후손들을 생각하면서 공천을 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최립이 세도가에서 태어나지 못해 교만하다고 평하나,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간결하고 고귀한 성품이라고 하면서

많이 따랐다고 한다. (사진출처:율곡단사업단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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