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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가 사치음식

윤의사 2024. 1. 27. 10:39
<세종실록> 16권, 세종 4년(1422) 5월 17일 .

예조에서 계하기를,

"태상왕의 수륙재(水陸齋)에 종친과 본조의 관원은 모두 전일에 정한 숫자에 의하고, 대언(代言) 1명, 각전(各殿)의 속고치(速古赤) 합 8명, 별감(別監)·소친시(小親侍) 합 10명, 행향사(行香使) 및 종친(宗親)·본조(本曹)의 당상(堂上)·낭청(郞廳)과 축사(祝史) 1명이 참예하는데, 대언(代言)과 속고치(速古赤) 외에는 반상(飯床)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반상에는 다섯 그릇에 불과할 것이요, 진전(眞殿)과 불전(佛前) 및 승려 대접 이외에는 만두(饅頭)·면(麪)·병(餠) 등의 사치한 음식은 일체 금단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초재(初齋)를 올릴 때에 거의 수백 명이나 모였으므로, 이러한 계가 있는 것이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서 눈여겨 볼 것이 바로 국수이다. 

지금은 한국인이라면 어디에서든 일상적으로 먹을 수 있는 국수가 사치음식이라 금하겠다고 나와있다.

송나라 서긍이 쓴 <고려도경>을 보면

 

“고려에는 밀이 적어서 중국에서 수입하고 있다. 따라서 밀가루 값이 매우 비싸 잔치 때가 아니면 먹지 못한다.”

 

라는 글이 보인다. 바로 국수가 혼례나 회갑과 같은 잔치가 아니면 먹을 수 없었던 귀한 음식이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요즈음 음식점에서 파는 국수 중 잔치국수가 있을까?

바로 밀의 재배가 어려운 한반도에서 밀을 중국에서 수입해야만 했기에 가격이 비싸 일상적으로 먹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려시대 국수맛은 엄청 맛있던 것 같았다.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 10여 가지의 음식 중 국수 맛이 으뜸이다.”

 

라고 기록할 정도였으니...

밀가루가 얼마나 귀하면 판소리 춘향가 가운데

 

“얼맹이 쳇궁기(체구멍) 진가루 새듯”

 

이란 사설이 나온다. 바로 밀가루를 진가루로 표현했으니 얼마나 귀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귀한 밀가루 대신에 국수를 만들던 것이 바로 옥수수와 메밀이었다. 옥수수를 가루로 만들어 반죽을 만든 후 틀에 넣어

눌러주면 올챙이처럼 생긴 것들이 떨어졌다. 이때 물이 담긴 그릇을 틀 아래에 놓아 바로 굳을 수 있게 만들었다. 

올챙이 국수를 억지로 국수를 만들었다고 해서 '억지국수'라고 부르기도 했다.

메밀로도 만들었는데, 서명응이 1787년 펴낸 <고사십이집(古事十二集)>에는

 

“국수는 본디 밀가루로 만든 것이나 우리나라에서는 메밀가루로 만든다.”

 

고 기록하였다. 메밀로 만들어진 국수로 냉면으로 발달되었던 것이다.

 

국수를 결혼이나 회갑과 같은 잔치에 먹는 것은 국수 길이처럼 부부가 오래도록 해로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어른들이 장수하기를 기원하는 뜻일 것이다. 

국수나무, 껍질이 하얗고 나뭇가지가 마치 국수 가락처럼 되어 있어 ‘국수나무’라 하였다. 옛날 사람들이 이 나무를 ‘국수’로 생각하며 배고픔을 달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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