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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가 돈의문을 복원한다고

윤의사 2024. 1. 15. 14:35

한양도성의 사대문은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이다.

그중 지금 자취가 없는 것은 서대문인 돈의문이다.

돈의문을 서울시에서 복원한다고 하니 반가우면서도 졸속이 되지 않도록 해야겠다.

 

돈의문은 서대문으로 ‘의(義)를 북돋는 문’이라는 뜻이다. 서대문의 위치는 경향신문 앞 정동 사거리였다고 한다.

원래 오늘날 독립문 근처에 있으면서 의주로 가는 사람들이 이용했던 문인데 풍수의 영향, 또는 당시 권력자였던

이숙번의 영향으로 문이 옮겨졌다가 정동사거리에 세종이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정동 사거리부터 세종로까지를

새문안길이라고 불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당시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풍수학생인 최양선이 돈의문이 궁궐의 팔과 다리 역할인데 이를 사람과 말이 다녀서

손상시켜서는 안된다.’라고 기록했다. 그리하여 지금의 경희궁 자리에 서전문을 세웠다가 세종대왕 때 정동사거리에

돈의문을 세웠다고 한다. 사람들은 ‘신문(新門)’이라거나, ‘새문’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유래가 되어 이곳을 ‘신문로’,

또는 ‘새문안길’이라고 한다.
다른 이야기는 태종이 임금이 되는데 큰 공을 세워 힘이 막강했던 이숙번의 집이 돈의문 앞에 있었다.

자신의 집 앞으로 사람들이 다니므로 시끄러우니까 문을 막아버렸다. 한자로 ‘색문(塞門)’이라고 하는데,

이 말이 변하여 새문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문을 옮길 정도로 오만하면서 사치스러웠던 이숙번은 결국 태종의 미움을

사서 태종 17년(1417)에 경상도 함양으로 귀양을 갔다. 겸손해야하는 것을 잊으면 결국 파멸에 이른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돈의문은 숙종 때 다시 지으면서 유지되다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던 1915년에 전차를 건설하면서 흥인지문과 돈의문을 철거하려고 했다. 하지만 흥인지문은 임진왜란 때 왜놈이 처음 한양성에 들어온 문이라 해서 문 옆으로 건설했지만, 돈의문은 목재와 기와가 염덕기라는 사람에게 205원 50전에 경매로 팔렸다고 한다. 일본이 우리에게 끼친 해가 얼마나 큰 지

또 한 번 느낄 수 있다.

 

사진으로 본 돈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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