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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도 동성애가?

윤의사 2023. 11. 13. 16:15

한국방송에서 오랜만에 대하사극을 방영한다.

바로 '고려거란전쟁'이다.

이제 시작이니 고려 목종 시기이다.

고려 7대 왕인 목종은 997년 17세에 즉위하나 어머니인 헌애왕후 황보씨 (후에 천추태후)가 섭정을 한다.

그런데 천추태후는 18세에 남편인 경종이 죽자, 김치양과 사통을 하여 아들을 생산하였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에 의해 정치에서 멀어진 목종은 유행간이라는 사람과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유행간은 여자였을까?

고려사를 보면

유행간은 용모가 아름다웠다. 목종(7대 임금, 재위 9971009)이 사랑하여 용양의 총애가 있었으니,

벼슬이 갑자기 합문사인으로 뛰어올랐다.”

라는 내용이 있는데, 여기서 용양남색(男色)” 곧 사내끼리 성교의 다른 말이다. 

심지어 유행간이 왕권을 넘나들기도 하였다.

그런데 천추태후는 자신과 김치양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왕권을 이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걸림돌이 있었다.

자신의 언니이자 경종의 비인  효숙왕후 황보씨에게 아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언니도 경종이 죽자 시삼촌인 태조의 여덟째 아들 안종(安宗) 욱(郁) 과 사통을 하여

생산된 아이가 대량원군이었다.

천추태후는 걸림돌인 대량원군을 제거하기 위한 작전에 들어갔다.

첫 번째는 대량원군을 스님으로 강제 출가시켜 신혈사로 보냈다.

이후 천추태후는 대량원군을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냈으나 실패하였다.

때마침 흥화진에 도순검사로 파견되었던 강조와 대량원군이 연합하여

정치에 관심은 없이 동성애에 빠진 목종을 내쫓고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어머니와 이모의 사통이 여자에게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하여 목종을 동성애자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도 목종은 효자였다.

강조와 현종이 천추태후를 고향인 충주로 유배보내자, 말잡이를 자처해 함께 길을 나섰다.

강조는 목종이 살아있는 한 자신이 역모를 꾀했다고 입방아에 오르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이에 강조는 김광보를 보내  충주로 귀양 가던 중 적성현(파주)에서 목종을 살해하였다.

목종의 시체는 화장되어 의릉에 묻혔다.

목종의 원래 묘호 민종(愍宗)이었다. 민종의 '민'(愍)은 '근심할 민' 자였기에 강조는 백성들에게

근심만 가져다 준 임금이란 의미이다. 이에 현종은 '목종'으로 바꾸었다. 

아들인 목종이 죽었지만 천추태후는 충주로 갔다가 외가의 고향인 황주로 이배되어 21년을 더 살다가,

1029년  개경으로 돌아와 숭덕궁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