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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에 벌써 시공 책임제가

윤의사 2023. 5. 28. 11:21

남산신성은 선도산성과 명활산성을 양쪽에 끼고 궁궐 반월성을 지키던 산성이었다. 도성의 남쪽 금오산(金鰲山) 북쪽의 계곡과 산봉우리를 연결해 돌과 흙으로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울산과 경주 외동에 위치한 관문성이 경주의 1차 방어선이라면, 울산 방향에서 월성을 방어하기 위한 2차 방어를 위해 쌓은 성이다. 성을 쌓을 때 당시 새로 지은 산성이라고 해서 남산신성으로 불린다. 둘레 3.7의 성인데 지금은 성벽 대부분이 무너진 상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남산신성은 진평왕(579~632) 13(591)에 처음 축성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평왕조를 보면

 

진평왕(眞平王) 13(AD591) 7월에 남산성(南山城)을 쌓았는데 그 둘레가 2855()이다.

 

라고 되어있고, 문무왕 때 창고를 지은 기록이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에 보인다.

 

문무왕 3(663) 1월에 장창(長倉)을 남산신성(南山新城) 안에 지었다.

 

<삼국유사> 문무왕 법민(文武王 法敏)에서는

 

왕이 즉위하여 남산에 장창(長倉)을 두었는데 길이 50(), 너비 15보였다. 곡창(穀倉)을 저장하고 무기(武器)를 보관해 두었다. 이것을 우창(右倉)이라 하였으며, 천은사(天恩寺)의 서북(西北)쪽 산 위에 있는 것은 좌창(左倉)이라 하였다. 다른 책에 말하기를 건복(建福) 8년 신해년(辛亥年·591)에 남산성을 쌓았는데 그 둘레가 2,855()라 하였다. 이는 진덕왕(眞德王)때 처음 쌓은 것이고 그 후에 수축한 것이다.

 

라고 보이나, 처음 쌓은 것을 진덕왕이라고 한 것은 진평왕을 잘못 쓴 것으로 보인다.

산성 안에 창고를 지어 무기와 식량을 저장하고 전쟁에 대비했다고 한다. 특히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면서 통일 왕조의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쌓았다고도 한다.

남산신성은 축조 당시 세운 남산신성비 덕분에 축조 시기와 과정을 알 수 있다. 비석은 193410월 경주 식혜골(현 경북 경주시 탑동)에서 비석 1기 발견된 이후 2010년까지 모두 10기가 발견됐다. 비문의 내용과 형식은 대체로 비슷하다. 신해년(辛亥年 591) 226일 비석을 세우고, 만일 3년 내 성벽이 무너지면 죄를 달게 받겠다는 맹세문 등이 있다. 성을 지휘한 중앙 관리의 벼슬과 성명, 인력 동원 책임자 명단도 새겨졌고, 각 촌락별로 할당받은 공사 구간도 몇 보 몇 척 몇 촌까지도 자세히 기록하였다. 성을 쌓는데 동원된 관리와 백성들에게 책임감을 부여하고 부실공사를 막기 위한 일종의 책임 시공제라고 하겠다.

1비는 193410월 경주박물관장 오사카 긴타로와 경주고적보존회 촉탁 최남주는 경주 남산 주변 민가 앞길에서 발견했다. 비석에는 신해년 226일에 남산신성을 쌓는데, 만약 쌓은 지 3년 이내에 성이 무너지면 법에 따라 죄를 다스릴 것이라는 명을 듣고 맹서(盟誓)한다는 내용이 있다.

1972년에 발견된 제5비는 민가의 구들장으로 쓰였던 것이 주택 개축 과정에서 발견돼 박물관으로 옮겨졌. 국민들이 살기 어려울 때 성곽의 비석들이 주춧돌이나 온돌의 구들장으로 많이 쓰였기 때문이다. 1994년 발견된 제9비의 경우 원위치에서 파내져 다른 곳으로 옮겨졌지만, 경주박물관 박방룡 학예사의 노력으로 그것이 원래 성벽 안쪽에 세워졌던 것임이 밝혀졌다. 남산신성은 지금까지 성문 터 6, 망루 22, 창고 터 3, 건물 터 5, 수문 8곳 등이 발견됐다고 한다.

남산신성
1비와 7비(국립경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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