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오늘은 독립운동가 김홍일 장군 타계

윤의사 2022. 8. 8. 10:57
매헌윤봉길의사의 상하이의거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김홍일장군은 평안북도 용천에서 1898년 9월 23일
김진건의 3남으로 태어났다. 중국군으로 활약하면 중국식 이름인 왕웅이나·왕일서 등을 사용하였다.
아버지가 중국이 다시 일어설 것을 예상하여 15세에 만주의 중국소학교에 진학했으나
언어, 인종차별문제로 귀국해 정주 오산학교에서 이승훈과 조만식의 제자가 되었다.
이승훈의 주선으로 황해도 신천경신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민족교육에 대한 일본 경찰의 감시로 투옥되기도 했으나 풀려나자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이곳에서 구국일보사 대표인 중국인 황개민의 도움으로 1920년 구이저우의 육군강무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 후 한국독립군에서 활동하며 독립군의용군단 대장, 조선의용군 부사령관 등으로 항일운동을 하다가
헤이허사변(黑河事變)으로 독립군이 참변을 겪은 후, 1926년 중국 국민혁명군에 가담하여 장개석의 휘하에서
1945년 5월 중국군 중장으로 승진될 때까지 대일항쟁과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국민혁명군의 군기처장으로 중국군 무기를 관리하면서 김구의 뜻에 따라 한인애국단의 의거에
무기를 제공하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
상하이의거 직전 중국군 상해병공창 주임으로 있으면서 매헌윤봉길의사를 비롯한 한국인 청년들과 함께
일본 해군기함 이즈모호의 폭파와 일본군 무기창고 폭파계획을 세웠다가 일본군의 조선인 노동자 제외에 따라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32년 일왕저격사건 때 이봉창의사의 폭탄 성능이 떨어져 실패하자 이를 거울 삼아
매헌윤봉길의사의 상하이의거 때에는 실험을 거친 후 폭탄을 전달해 성공할 수 있었다.
1945년 12월 중국 동북보안사령장관부 고급참모 겸 한교사무처장으로 광복 후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보호와 본국 송환에 힘썼다.
1948년 8월 귀국하여 육군 준장으로 임명되어,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내며 군간부 양성에 이바지 하였다.
6.25 전쟁 중에는 시흥에서 남침하는 북한군을 맞아 1주일간 싸워 북한의 남침을 지연시켰으며,
육군 제1군단장으로 평택지구에서 포항탈환작전에 이르기까지 전공을 세웠다.
1951년 10월 예편해 주중대사로 한중관계 발전에 이바지 하였다.
1961년 5·16군사정변에 참가해 박정희 전대통령과 뜻을 함께 하다가 1965년 한일협정을 적극 반대하면서
박정희와 결별하고, 1967년부터 재선 국회의원을 역임하면서 야당을 이끌며 삼선개헌과 유신체제에 반대하였다.
1980년 8월 8일에 82세로 타계하였다. 건국에 이바지한 공로로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백범과 함께 한 김홍일 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