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오늘은 영화 감독 나운규 타계

윤의사 2022. 8. 9. 19:42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은 일제에 억눌려 있던 민족혼을 일개우며, 짓밟히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저항의 길로 나아가게 하였다. 나운규는 오직 조국과 영화를 위해 서른여섯의 짦은 생애를 불사른 천재적인 영화인이었고, 한국 영화는 나운규로부터 시작해 나운규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호는 춘사이다.

 

나운규는 함경북도 회령에 있는 신흥학교를 졸업한 뒤, 독립군을 키우는 학교로 알려져 있던 중국 간도의 명동중학에 들어갔다. 그 이듬해 삼일 운동이 일어나자, 나운규는 회령에서 만세 운동을 이끌다 경찰에 쫓겨 북간도와 만주 지방을 떠돌았다. 이때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그러다 다시 중동중학에 들어갔으나, 터널을 폭파하려 했다는 혐의로 붙잡혀 16개월간 청진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였다.

 

감옥에서 풀려난 나운규는 마침 회령으로 순회 공연을 온 극단 예림회에 들어가면서 예술에 눈을 떴다. 그리하여 이듬해 조선 키네마라는 영화사가 부산에 세워지자 연구생으로 들어갔다. 이후 나운규는 운영전’, ‘심청전’, ‘농중조같은 영화에 출연하여 연기파 배우로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각본을 쓰고, 감독, 주연을 맡은 아리랑을 내놓았다. 이 영화는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비애와 저항 정신을 그린 것으로 일제에 억눌려 있던 민족혼을 일깨우며 진한 감동을 안겨 주었다. 단성사에서 개봉된 첫 날부터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전국 곳곳을 돌며 수많은 관객을 끌어모았다. 주인공이 아리랑 고개를 넘어 끌려갈 때면, 관객 모두가 하나가 되어 눈물을 흘리며 아리랑을 따라 불렀다고 한다.

 

나운규는 끊임없이 노력하고 실험하는 영화인이었다. 그는 나운규 프로덕션을 세워 나도향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최초의 문예 영화인 벙어리 삼룡이를 제작하였다. 또한 새로운 영화 기법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 다녀오기도 하였고, 또한 아리랑 제3을 제작하면서 녹음 장치에 성공하여 한국 영화가 유성 영화 시대를 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 오몽녀는 새로운 영상미를 시도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나운규와 아리랑 출연 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