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오늘은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일어난 날

윤의사 2022. 1. 4. 09:31

신채호선생은 <조선사 연구초>에서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의 가장 큰 사건으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꼽고 있다.

 

(고려 인종 13).....묘청의 천도 운동에 대하여 역사가들은 단지 왕사(王師)가 반란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판단한 것이다. 그 실상은 낭가(郎家)와 불교의 연합 세력과 유교 세력의 싸움이며, 국풍파(國風派) 대 한학파(漢學波)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묘청의 천도 운동에서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이겼으므로 우리 역사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 사상인 유교 사상에 정복되고 말았다. 만약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이 이겼더라면, 우리 역사가 독립적, 진취적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일천년래 가장 큰 사건이라고 하지 아니하랴.

 

묘청은 언제 태어났는지 역사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다. 사망 연도가 1135, 인종 13년이라는 것이 확인될 뿐이다.

그는 고려 중기의 승려로서 서경(평양) 사람이라고 하는데, 속성(俗姓)이나 본관은 알 수 없다. 뒤에 이름을 정심(淨心)이라고 고쳤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 경위도 알 수 없다. 승려의 신분이면서도 그는 도교에 매우 심취되어 있었으며 그 방면에 박식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음을 그의 여러 행적을 통해 알 수 있다.

묘청은 개경에 세력 기반을 확보하기 위하여 일관(日官)인 백수한을 제자로 삼으며 말했다.

나라가 불안한 것은 다 개경의 운이 다했기 때문이라네.”

맞습니다. 나라의 기운을 뻗어가게 하기 위해서는 서경으로 옮겨야 합니다.”

서경이라면 고구려의 웅장한 기상이 있지 않는가?”

그런데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파들이 찬성할까?”

먼저 서경 출신의 벼슬아치들을 설득해야지요.”

서경 출신이라?”

서경 출신 중 폐하의 신임이 두터운 사람은 바로 좌사간 정지상입니다. 정지상을 중심으로 하여 내시 낭중 김안, 홍이서, 이중부, 문공인, 임경청 등을 끌어모으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자네가 그 일을 맡아서 해주게나.”

선생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백수한은 곧 좌사간 정지상을 만났다. 정지상은 백수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적극 참여할 것입니다.”

정지상은 이후 묘청, 백수한과 함께 음양비술(陰陽秘術)에 능하여 삼성(三聖)라 불리웠다.

정지상이 묘청과 뜻을 함께 하기로 한 것은 내심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면 자신들이 정치의 중심으로 떠오를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정지상은 백수한을 만나고 난 뒤 인종에게 상소를 올렸다.

 

묘청은 범인(凡人)을 넘어선 사람이며, 그의 제자인 백수한 또한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들에게 우리나라의 큰일들을 물어본 후에 나랏일을 처리한다면 좋은 성과를 이룰 것입니다.

 

정지상은 상소문을 쓴 후에 홍이서, 이중부, 문공인 등에게 보여주면 뜻을 함께 할 것을 다짐하며 서명하였다. 상소문에 서명하지 않은 사람들은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파들 뿐이었다.

상소문을 읽어본 인종이 묘청을 찾았다.

지금 나라가 너무나 힘듭니다. 이러한 나라의 어려움을 어떻게 하면 이겨낼 수 있을지 그대의 의견을 듣고 싶소.”

폐하,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우리나라가 이처럼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은 수도인 개경(開京)의 지덕(地德)이 쇠약한 때문입니다.”

개경의 기운이 쇠퇴하였다고요?”

인종이 되물었다.

그러하옵니다.”

어찌하면 좋겠소?”

우리나라를 다시 일으키고 나라의 큰 운을 얻기 위해서는 지덕이 왕성한 서경으로 도읍를 옮겨야 하옵니다.”

서경으로 도읍을 옮겨야 한다고요?”

서경의 임원역(평남 대동군 부산면 신궁동)에 궁궐을 짓고 폐하께서 자리를 잡으신다면 천하를 다스릴 것입니다. 금나라가 공물을 바치며 항복할 것이며, 주변의 26개 나라가 모두 상국으로 섬길 것입니다.”

당시 고려 사회에는 신라 말기 이래 풍수지리설이 크게 성행하고 있어서 묘청 등의 주장은 큰 호소력을 갖게 되었다. 곧 인종의 총애와 함께 백수한 정지상 등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인종은 묘청의 말에 귀가 솔깃해져 1127년 이후 서경에 자주 방문하였다. 112811월 김안으로 하여금 공사를 감독하게 하면서 임원역에 대화궁을 짓게까지 하였다. 이듬해 2월에 대화궁이 완성되었다. 대화궁을 공사하는 동안에 개경에서도 궁궐 보수 공사를 하였다. 부역에 동원되는 백성들의 불만은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궁궐이 완성되자 인종은 서경으로 가서 낙성식을 가졌다. 이때 묘청이 인종에게 말했다.

폐하, 이제 황제라고 칭하시고, 연호를 제정하십시오. 그리하여 대외적으로 고려의 위상을 높여야만 하옵니다. 그리고 송나라와 협력하겨 금나라를 공격해야 하옵니다.”

그러나 묘청의 제안에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파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인종은 개경파의 손을 들어주면서 묘청의 뜻에 따르지 않았다.

인종이 서경에 머문 지 1, 서경 중흥사탑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구실을 찾고 있던 개경파들이 말했다.

묘청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묘청은 오히려 서경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화궁 주변에 임원궁성을 쌓고, 문수보살을 비롯한 여덟 보살을 모신 팔성당을 지어야 합니다.”

인종은 묘청의 뜻에 따라 건설 공사를 하였다. 성이 완공되자 개경에 머물던 인종이 서경을 찾았다. 그러나 갑자기 돌풍과 폭우가 쏟아져 인종은 진창에 빠지고, 시종들은 인종을 찾느라 헤매였다.

개경파들은 다시 묘청이 허위 사실을 퍼드리고 다닌다며 상소문을 올렸다. 인종은 오히려 묘청에게 삼중대통지 누각원사와 자색의 의복을 내려주었다. 묘청은 인종이 자신을 믿어주자, 다시 한번 상소문을 올렸다.

 

황제라 칭하시고 연호를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묘청의 제안은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파에 의하여 실현되지 못했다. 서경천도 운동이 실패했다고 생각한 묘청 일파는 서경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민병덕의 <반역의 한국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