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오늘은 윤봉길의사가 순국하신 날

윤의사 2021. 12. 19. 10:07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전승 기념식을 열던 일제 침략자들에게 폭탄을 던져 벌하였다.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은 독립 의지를 다시 한 번 세상에 널리 알렸고, 중국과 더욱 힘을 합치는 계기가 되었다.

본명은 우의, 호는 매헌이다.

 

윤봉길은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여섯 살 때 이미 천자문을 익히고 한학을 배울 만큼 공부에 재주를 보였다.

그는 열한 살 때 덕산 보통학교에 들어갔으나, 그 이듬해 삼일 운동이 일어나자학교를 그만 두었다.

어린 마음에도 일본의 노예를 키우는 교육을 더 이상 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 뒤 오치서숙에서 한학을 배우면서 혼자 일본어를 익혔고, <개벽> 같은 잡지를 읽으며 신학문도 공부하였다.

 

윤봉길은 농촌의 현실과 문제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자기의 고향 마을부터 계몽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는 자기집 사랑방에 야학을 세워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우리글과 역사는 물론 산수, 과학 및 농사 지식까지 가르쳤다. 나아가 농촌 사회 스스로 자주적으로 일들을 해 나가도록 농민들을 교육하기 위해 월진회를 만들었다.

윤봉길은 일제의 간섭으로 숱한 어려움을 겪었으나 꿋꿋하게 활동을 계속하였다.

 

일제의 탄압이 거세질수록 윤봉길의 독립 운동에 대한 의지는 더욱 커졌고,

조국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1930년에 망명길에 올랐다.

중국 만주를 거쳐 어렵게 상하이에 도착한 윤봉길은 김구를 만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쳐 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1932년에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여 김구로부터 특명을 받았다.

그 당시 일본은 만주사변과 상하이 전쟁에서 이겨 들떠 있었고,

일본 국왕의 생일과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기로 하였다.

그리고 김구의 특명이란 바로 이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의 주요 인사들을 죽이라는 것이었다.

기념식이 있는 429일 아침, 윤봉길은 일본인처럼 미끈하게 차려입고 도시락과 물통 모양의 폭탄을 숨긴 채

훙커우 공원에 들어갔다. 그리고 기념식이 시작될 무렵, 단상을 향해 물통 폭탄을 있는 힘껏 던졌다.

!” 하고 폭탄이 터지면서 일본군 사령관을 비롯한 주요 인사 1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윤봉길은 그 자리에서 붙잡혀, 그 해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 육군 형무소에서 순국하셨다.

이 소식을 들은 중국의 주석 장개석은 중국의 4억 인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인 한 사람이 해냈다.”며 놀라워했고,

더욱 적극적으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원하였다.

의거 직전의 윤봉길 의사
장졔스의 친필, '장사의 뜨거운 피! 불타는듯한! 의기 (義氣)가 천년의 세월이 지나 가도록 빛날 것'이라고 썼다.
예산에 있는 생가
효창공원에 있는 윤봉길의사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