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동쌤의 역사 속의 오늘은?

오늘은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신 날

윤의사 2021. 12. 16. 10:13

명나라와 왜의 교섭이 결렬되자, 왜는 조선에 군사를 보냈다. 이를 정유재란이라 한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보다 조선을 왜가 상대하기는 버거웠다. 비록 칠전량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패배했지만,

배설이 12척의 배를 이끌고 도망한 것을 기반으로 이순신장군은 재기하였다.

명량에서 왜군을 물리쳐 왜의 보급로를 차단하였다.

그리고 풍신수길이 죽으며 철수를 지시하자, 왜는 하동부근으로 모여들었다. 

이순신 장군은 왜군을 한놈도 살려보낼 수 없었다. 

 

이순신은 더욱 병사들을 격려했다.

한 놈도 살려 두어서는 안 된다. 배 한 척도 놓치지 말라!”

이순신은 앞장서서 왜군 배를 따라나섰다. 이때 갑자기 이순신이 뒤로 쓰러졌다.

왜군의 총알이 이순신의 왼쪽 가슴에 명중했던 것이다. 옆에 있던 조카 완이 얼른 이순신을 부축했다.

완아! 어서 북을 두드려라. 방패로 나를 가리고 네가 나와 같이 보이도록 하라."

완은 작은아버지이자 통제사인 순신의 뜻을 곧 알아챘다. 완은 얼른 순신의 투구를 집어 쓰고 명령했다.

공격하라! 조금도 물러서지 마라!”

워낙 이순신의 목소리를 빼닮은지라 아무도 순신의 죽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순신은 몸에서 점점 기운이 빠졌다.

순신은 완을 불렀다.

"결코 싸움이 끝날 때까지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싸움에 열중하느라 아버지의 위중함을 알아채지 못했던 아들 회가 나중에 알고 순신을 부축했다.

, 아버지!”

회야, 이러지 마라. 만약에 내 죽음이 알려지면 우리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이고, 왜놈들의 사기는 오를 것이다.

어서 싸우거라. 장수로 태어나 전쟁터에서 죽는다면 그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에 있겠느냐? 마지막으로 싸움이 어떻게 되는지 보고 싶구나.”

이순신이 누워 있는 배 바닥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회는 피투성이가 된 아버지를 안고 조명 연합군과 왜군의 전투 광경을 볼 수 있게 했다. 이때 이순신은 눈을 부릅뜨고 있었고, 회는 아버지가 전투 광경을 계속 지켜보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의 얼굴이 옆으로 기울었다. 여전히 순신은 눈을 크게 부릅뜬 채였다.

회는 아버지의 눈을 쓸어내렸다.

쫓기던 왜군은 50여 척의 배만 이끌고 왜국으로 도망갔다.

순신의 장렬한 전사는 적선 450척과 왜놈 수천 명의 목숨과 바꾼 것이었다. 이것을 노량 대첩이라고 한다.

조명 연합군이 승리하자, 진인은 순신의 대장선으로 왔다.

"장군, 어서 나오시오. 우리가 이겼소."

회는 조용히 진인에게 말했다.

"아버님은 전사하셨습니다."

진인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진인은 배 바닥에 엎드려 세 번 절을 했다.

"장군, 승리를 함께 나누어야 하는데, 이것이 어인 일이란 말이오."

진인은 부하들이 보든 말든 배 바닥을 치며 울었다. 이때 송희립을 비롯한 부하 장수들이 순신의 죽음을 발표했다. 조선 수군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럴 리가 없어. 우리 장군님이 왜 전사하셔?"

"맞아, 다시 일어나실 거야."

부하 장수들이 무릎을 꿇고 울음을 터뜨리자, 조선 수군은 바닥에 엎드려 통곡을 했다. 왜군이 가장 두려워하던 순신은 마지막으로 쫓기는 왜군을 물리치다가 남해에 그 모습을 뚜렷하게 새기고 54세를 일기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순신이 노량 해전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선조 임금은 나라에서 장례를 치르도록 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6년 후에는 권율, 원균과 함께 선무일등공신이 되었다. 1643(인조 21)에는 충무(忠武)’라는 시호가 주어졌으며, 1793(정조 17)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민병덕의 <쉽게 풀어쓴 인물 이야기 한산>에서)

현충사의 십경도 중 장군의 모습을 방패로 가린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