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문화유산/조선 왕릉

조선 왕릉 영회원

윤의사 2021. 1. 2. 12:04

비운의 여인 민회빈 강씨(1611~1646)가 잠든 곳이다.

 

민회빈의 본관은 금천이며, 우의정 강석기의 딸이다.

인조 5년(1627)에 소현세자와 가례를 치루었다.

병자호란이 끝난 1637년에 세자와 함께 심양으로 볼모가 되었다가 1644년 귀국하였다.

청에 볼모로 있는 동안 소현세자가 주로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정치와 외교 문제,

그리고 서양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 민회빈은 볼모로 잡혀온 사람들의 숙식을 해결하였다.

민회빈은 청나라를 상대로 면포, 호피, 종이, 약재, 생강 등의 무역을 하였다.

그리고 볼모로 오랜 기간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무역으로 남은 이익으로 농토를 사서 농사를 지었다.

무역과 농업을 통하여 벌어들인 돈으로 청나라에 포로가 되어 노비로 팔려간 조선인을 사서 속환시켜

농장에서 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청나라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던 소현세자가 귀국하자,

인조는 청나라에서 '소현세자에게 양위를 강요하거나, 세자 대신 볼모로 잡히지 않을까?' 의심을 하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인조의 독살설에 의하여 소현세자는 귀국 후 두 달만에 세상을 떠났다.

소현세자가 죽은 뒤 민회빈과 반목하던 조소용(趙昭容)이

"강빈이 인조를 저주하였다"

고 무고하여 민회빈 형제들을 모두 유배시켰다.

이어 인조의 수랏상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를 받아 후원 별당에 유폐되었다가

조정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646년 3월에 사사(賜死)되었다.

세자빈이었으나, 사사되어 가족에게 넘겨져 초라한 봉분이었으나,

숙종 44년(1718)에 무고함이 밝혀지면서 복위되었으며,

복원묘를 '민회묘'라고 했다가 고종 7년(1870)에 영회원으로 바뀌었다.

영회원은 '애기릉'으로 불리기도 한다.

영회원 전경
문신상
장명등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과 귀면상

 

사진 출처:광명시청

'보고 배우는 문화유산 > 조선 왕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왕릉, 김포 장릉  (0) 2021.10.22
조선 왕릉 정릉  (0) 2021.01.23
조선 왕릉 광해군묘  (0) 2020.04.29
조선 왕릉 연산군묘  (0) 2020.04.28
조선 왕릉 융릉  (0) 2020.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