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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와 기생

윤의사 2020. 5. 7. 16:05

오늘날 기차는 공중에 가설한 전선으로부터 전력을 공급받아 달린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1969년까지 서울에는 전차가 다녔다.

우리 나라에 전차가 등장한 것은 1898년이다.

을미사변으로 일본인에 의해 시해된 명성황후의 릉을 참배하러가는 고종이 1회 가는 비용이 10만원이 넘었다. 당시 서울의 기와집 한 채 값이 1000원 남짓 했으니 어마어마한 돈이다.

1898219일 한성에서의 전기 사업권을 가지고 있던 미국인 콜브란(Collbran,H.)과 보스트윅(Bostwick,H.R.)은 많은 비용을 들이며 능참배를 하는 고종에게 비용 절약의 방법으로 전차 건설을 제안하였다.

창덕궁과 덕수궁에 전기를 설치하여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던 고종이

두 사람의 제안을 받아들여 전차를 건설하였다.

1898915일 오후 4시에 기공식을 하면서 공사가 시작되어, 1899년 5월 4일에는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1단계가 완공되었다.

하지만 고종과 콜브란 간에 맺어진 계약은 미국식으로 불평등한 협약이었다.

전차가 지나가는 토지를 제공하는 것도, 건설비용도 모두 고종의 부담이었고,

회사의 조직과 운영은 미국식으로 하였기에 불공정 계약이었던 것이다.

75600V의 직류 발전기 1대를 도입하여 동대문에 발전소를 세워 전차의 동력원으로 이용되어 시속 8km로 달렸다.

전동차는 40명이 앉을 수 있는 개방식전차 8대와 고종을 비롯한 황족들이 타는 고급전차 1대가 도입되었다.

전동차의 기관사들은 일본 교토전차회사에서 일했던 일본인을 초청하였고, 차장은 한국인이 맡았다.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행하며, 정류장이 따로 없이 손님이 손을 들면 정차해 승객을 태웠다.

개방식전차 비바람이나 눈보라가 치면 어려움이 있었다.

개방식전차에도 가운데는 유리창과 간막이로 비바람을 막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돈 있는 사람들이 서울의 기생들을 유혹할 때 개방식 전차의 특실을 이용하여 데이트를 즐기곤 하였다.

이후 전차는 1968년 11월 30일까지 운행되다가 교통 흐름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운행 정지하였다. 

 

개방식 전동차, 가운데 ㅇ 자가 표시된 곳이 특실이다.(국립민속박물관)

 

 

1960년대 서울을 달리던 전차(경희궁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