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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허를 받아야 할 수 있는 보부상

윤의사 2020. 5. 21. 20:53

필자가 어렸을 때 할머니들이 집집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였다. 이들을 방물장사라고 하였다. 방물은 여자가 쓰는 화장품, 바느질 기구, 패물 따위의 물건 등을 가리키지만 할머니들은 여자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 이외에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도 가지고 다니며 팔았다.

할머니들은 주로 머리에 물건을 이고 다니면서 장사를 하기 때문에 보상(褓商)이라 했으며, 남자들은 주로 등에 물건을 지고 갔기에 부상(負商)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행상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백세 시대의 노래로 알려진 정읍사에 행상을 나간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간절한 아내의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달님이시여/

높이 높이 돋으시어/

멀리 멀리 비춰 주소서./

시장에 가 계신가요?/

위험한 곳을 디딜까 두렵습니다./

어느 곳에서나 놓으십시오./

당신 가시는 곳에 저물까 두렵습니다.

 

우리나라는 농업 사회이다. 그러므로 먹고 입는 것을 자급자족하는 사회였지만, 생필품은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살기 시작한 아래로 행상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오늘날은 할머니들 대신에 1톤 트럭에 채소나 어물 등의 물건을 싣고 골목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것으로 변화하였다. 오늘날에야 운전 면허증과 1톤 트럭만 있으면 관청의 허락을 받지 않고도 장사를 할 수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그렇지 못했다.

 

조선시대에 행상은 국가에 세금을 내야 하고, 또 면허증을 받아야 했다. 경국대전호전 잡세조에 이런 규정이 있다.

 

행상에게는 노인(路引·여행 허가증)을 발급해 주고 세금을 거둔다. 육상(陸商)은 매월 저화(楮貨) 8, 수상(水商)은 대선(大船)100, 중선이 50, 소선이 30장이다.

 

나라에서는 상업을 아주 천한 것으로 여겼다. 성리학에서 물질적 생산이 없는 상업을 천시하는데다가 행상이 지나치게 많아지는 것을 적제하기 위하여 행상을 등록시키고 세금을 부과하였던 것이다.

일반 백성들도 행상을 천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늘날의 3D업종이었던 것이다. 힘들고 위험한 직업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돈과 물건을 가지고 다니는 행상이었기에 도적들의 표적이었기에 목숨을 빼앗기기까지 하였다. 보부상들이 자기끼리 조합을 만들어 보호하려고 했던 것도 바로 도적들의 공격에서 자신들을 지키고자 함이었던 것이다.

보부상 인장과 인궤, 보부상 -

한말에 보부상들은 조직화되면서 주요 문서에 인장을 사용했는데, 이들 인장이 찍힌 문서는 보부상의 신용의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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