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우는 인물사/인물여지도

충무공 김응하장군

윤의사 2020. 4. 19. 16:41

김응하는 철원군 어운면 김지사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어른스러웠다.

선조 25(1592) 그의 나이 13세 때 전국적으로 발생한 역병으로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나자,

그는 아우 응해와 같이 농사를 지으며 밤에는 병서를 읽는 주경야독을 하였다.

선조 38(1605). 25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선천군수의 직책을 제수받고

종성지방의 변경 수비 임무를 맡았다.

이때 중국 북쪽에서는 임진왜란으로 조선을 돕기 위해 파견된 명나라 원군 때문에 관심이 적어진 까닭에

누르하치가 이끄는 만주족이 나라를 세우니 바로 후금이다.

광해군 10(1618)에 누루하치는 명나라의 동부지방을 공격했다.

명나라는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광해군은 총대장인 강홍립을 불러 관형향배(觀形向背:정세를 보고 행동하라)’의 명령을 내렸다.

후금의 기세가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광해군은 굳이 후금을 자극할 필요가 없으니,

적당한 때를 봐서 항복하라는 것이었다.

김응하는 조리장이 되어 원군에 참여하였다.

초반 3번에 걸친 전투에서는 조명연합군이 승리했지만,

갑자기 맹렬한 회오리바람이 몰려와서 티끌과 모래가 아군의 얼굴을 때리며

햇빛을 가려 총과 활을 쏠 수가 없게 되었다. 후금군은 이대를 맞아 조명연합군을 공격하니

거의 모든 군사가 죽게 되었다.

김응하 장군은 뒤에 있는 버드나무를 의지하고 활을 당겼다,

3백 개의 화살을 다 쏘았을 때 손에 불이 날 지경이었지만,

다시 장검을 잡고 종횡무진 적을 베었다.

그러나 버드나무 뒤에 숨어든 적병의 기습으로 인해 마침내 김응하는 장렬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

이때가 161934일로 응하 나이 40세였다. 김응하의 용맹에 감동한 후금 군사들은

김응하를 장사지내고 柳下將軍)이라고 불렀다.

이 소식에 나라에서는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명나라 신종도 요동백의 벼슬을 추증하고 유가족에게는 은 삼백 냥을 보내왔다.

이로써 광해군의 외교전략은 성공을 거두었다,

즉 김응하의 죽음으로 명나라에 재조지은(在朝之恩), 반면에 강홍립의 투항으로 후금에는 공격할 의사가 없었다는 중립외교의 성과를 거둘 수가 있었다.

 

김응하 묘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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